오늘 우리가 읽은 열왕기에서 나아만은 자기의 병을 고치기 위해
참으로 먼 길을 왔고, 많은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군마와 병거도 많이 거느리고 왔습니다.
이것을 묵상하다보니 옛날에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전에 군대의 어떤 장교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자기가 모시는 장군이 저희 수도원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전화를 받으며 자기 부인을 위해 미사를 드리는 사적인 일에
부관을 통해서 부탁을 하는 것이 속으로 못마땅했는데,
더욱 못마땅했던 것은 처음 미사를 드리러 올 때
자기 가족만 온 것이 아니고 부하들을 여럿 거느리고 온 것입니다.
못마땅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부인의 고통이 참으로 딱하고,
오랜 기간 병으로 고생하는 부인을 그토록 사랑하는 것이 아름다워
저도 정성껏 미사를 봉헌하였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힘썼습니다.
생각해봅니다.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는 자기가 군대 장성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면서 자기 부하를 데리고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자비가 필요한 사람으로 홀로 겸손하게 나아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이 그렇게 온 것은 하느님께 미사를 드리러 온 것이지만
저에게 온 것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저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보기도 하지만
세속의 눈으로 저를 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엘리사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처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람으로 처신하는 것은 어떻게 처신하는 것입니까?
특권의식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하고,
특권자의 기도는 들어주실 거라고 잘못 생각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이런 특권의식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시대의 과부와 엘리사 시대의 나아만 예를 들며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그뿐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 나올 때 정성된 마음으로 나와야겠지만
정성이 지극해야만 하느님이 들어주실 거라고 잘못 믿게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시리아 장수 나아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저 요르단 강 물에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에 성의 없다고 역정을 냅니다.
자기가 그렇게 먼 길 힘들게 왔으면 엘리사도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런 그에게 그의 부하가 말합니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지극정성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태도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극정성이 하느님이 사랑과 은총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극정성을 다해야만 하느님 마음을 흡족케 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성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기 위해 우리가 갖춰야 할 예의이고,
주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해 미리 드리는 우리의 감사일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치성致誠은 좋습니다.
어떤 치성입니까?
사랑의 치성입니다.
자식이 밤늦게까지 공부하는데 발 뻗고 잘수 없어 드리는 어미의 치성,
하느님의 사랑에만 맡기고 아무 것도 안 할 수 없는 어미의 치성입니다.
자식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랑의 치성이며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사랑의 치성입니다.
사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든
사랑이 참으로 순수하다면 그 사랑 앞에서는 특권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참으로 순수하고 겸손하게 하느님 사랑에로 나아가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