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지나고 날씨가 풀리면서 봄이 오듯이, 성탄을 지내고 나면, 얼마 후에 바로 사순 기간이 시작됩니다. 바쁜 일상에 쫓겨 가다 보니, 30여 일간의 기간도 별 의미 없이 지나가고, 어느덧 우리는 성주간, 성삼일 앞에 와 있습니다.
예수의 탄생, 예수의 죽음, 예수의 부활. 세상은 성탄절이라는 이름으로, 부활절이라는 이름으로 떠들썩하지만, 부활을 기해서 예수의 수난에 대한 영화도 개봉되고, 몇몇 사람들은 그 영화를 보면서 눈물도 흘리지만, 한편으로는 별 감흥 없이, 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예식, 치르고 나야할 과정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복음을 살아간다는 수도자로서, 복음을 선포하는 부제로서, 그 누구보다도 복음에 가까이 있어야 할 사람이지만, 예수의 수난이 직접 피부에 와 닿지 않고, 그렇기에 전례 때만 잠깐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지나가는 그런 것이 되고 있지 않나 생각도 해 봅니다. 물론 이렇게 가다보면 부활의 기쁨도 그 의미를 잃고, 기뻐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마태 26,34) 지금 우리의 상황은, 적어도 저의 상황은, 베드로가 처할 죽음의 위기,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린 그런 상황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더 이상 입으로 예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아니 오히려 사람들에게 입으로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마음은, 몸은,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다른 형제들에 대한 희생. '다른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25,40)라는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다른 형제들에 대한 희생의 거부는, 예수님께 대한 행위의 거부로 해석 될 것이고, 그렇게 저는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거부하게 됩니다.
물론 저의 머리는, 그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찾아내고, 저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점점 더 예수님의 존재를 부정하게 됩니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26,35) '그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26,56)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수도자로서의 삶을 선택했다는 것은, 삶으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하지만 정작 삶에 있어서는, 겟세마니에서의 제자들처럼, 저의 몸은 희생을 포기하고, 그 어려운 순간, 그 까다로운 순간을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신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26,42) 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시기에, 인간이 겪는 고통, 그 중 가장 극심한 죽음의 고통을 벗어나고 싶어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26,39) 하지만 아버지의 뜻은 그 잔을 마시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잔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희생의 순간, 그 어려움의 순간, 그 벗어나고 싶은 까다로움의 순간,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머리를 굴려 벗어날 방법만을 찾았기에, 사순이 의미 없이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27,54)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이런 고백이 나오지 않고, 예수님의 죽음을 접한 사람을 통해 '참으로'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삶의 순간에 죽지 않으면서, 지금의 삶에서 희생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복음을 전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진정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삶에서의 사소한 희생, 자그마한 내어줌, 그것은 한편으로는 하찮게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위대한 고백이고, 하느님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남은 한 주간,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삶에 다가오는 자그마한 희생 하나하나를 몸으로 살아가는 시간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