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기리는 오늘이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기뻐해야 할 오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어찌 우리의 기쁨입니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기뻐할 일이지 왜 우리의 기쁨입니까?
2천 년 전 예수님의 부활이 왜 오늘 나에게 기쁩니까?
여기서 예수님이 부활하고, 무엇보다도 내 안에서 부활해야지 기쁘지
어찌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것이 이곳의 내게 기쁨입니까?
그리고 오늘 저는 진도의 침몰한 배에서 자식을 잃은
어미 아비의 입을 빌어 이렇게 의문을 하느님께 제기합니다.
하느님, 내 자식이 다시 살아나야 기쁘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난 것이 어찌 나의 기쁨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자식을 잃은 부모는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아니,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화가 납니다.
내 자식은 죽었는데 예수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화가 납니다.
그러니 이들 부모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의 기쁨이 되기 위해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그들의 자식들도 같이 부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그들도 같이 부활해야 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키셨으니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와 함께 이들의 자식들도 부활시키셔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자식들을 부활시키지 않으신다면 제가 아무리 신부라도
이 부모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라고 할 수 없고
이 부모들에게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지금은 비록
이런 말을 할 수 없고 그래서 아무 소리 못하지만
세월이 많이 지난 뒤에는,
그러니까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인 뒤에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었다가 부활하셨고, 죽으셨기에 부활하신 것이니
당신 자녀도 죽었으니 이제 다시 살아날 것이고,
죽었기에 이제 다시 살아날 차례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만 죽는 것이 아니고 주님도 죽으시고,
주님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도 부활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부활을 믿는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부활의 희망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나아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담대하게 고백하고 당당하게 선포할 것입니다.
나를 죽이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입니다.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느님이 예수를 죽이셨고,
예수를 죽이신 하느님이 나를 죽이신 것이니
나를 죽이신 것은 예수님처럼 다시 살리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는 예수님과 우리가 둘이 아니고(不二)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죽으신 거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죽고 우리는 죽지 않아야 되는데, 우리는 예외 없이 죽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고 당신이 대신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을 때 우리와 함께 죽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는
<하나 되는>이라는 말과 <함께>라는 말이 두드러지게 많습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
<그리스도와 함께>란 하나가 되는 함께, 하나인 함께이며,
<둘로서의 함께>가 아니라 <하나로서의 함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오셨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믿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반문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오지 않으시는가?
만일 우리가 죄를 지어야지만 오신다면 이는 마치
자식이 죄 지어 감옥에 가야지만 부모가 찾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이 감옥에 있건 어디에 있건 늘 함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짓건 안 짓건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함께 있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 죽지 않으시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무엇도 우리를 그분과 떼어놓을 수 없게 한다고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바 있는데,
그리스도는 우리가 죄를 짓건 안 짓건 본래 우리와 하나이시고,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아도 본래 우리와 함께 죽으십니다.
이는 마치 어머니 태중에 있던 자녀가 태어나 어미와 자식으로 있지만
어미는 여전히 자녀와 모든 것에서 하나 되고 함께 하듯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였던 우리도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 사시고,
우리와 함께 죽으시고, 우리와 함께 부활하십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죽고, 우리와 함께 부활하고자 하시니
이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고, 우리가 그분과 함께 부활할 차례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함께 죽고 부활한다는 것입니까?
오늘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세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세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합니다.
그렇다면 세례란 무엇이고, 세례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세례란 홍해로 들어가는 것이고, 홍해를 건너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죽음을 건너는 것입니다.
종살이하던 이집트를 떠나 행복의 땅 가나안을 가려면
반드시 홍해를 건너야 하는데 이집트 군대가 뒤에서 쫓아옵니다.
홍해로 들어가도 죽고 되돌아가도 죽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란인데 이때 홍해로 들어가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홍해로 들어가면
죽음의 바다 홍해가 생명의 바다가 됩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됩니다.
세례란 죄와 세상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이 아닙니까?
진도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우리의 진도가 홍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고 우리는 기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