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였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감정 상태에 대한 여러 표현들이 많이 있고,
그 표현들을 모아 놓으면 감정 상태가 매우 복잡다단합니다.
두려움, 무서움, 의혹, 놀람, 기쁨이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감정은 두려움과 무서움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과 무서움이 어떤 것인지 잘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인지,
주님 이전에 이미 어떤 무서움과 두려움 상태에 있는 건지 말입니다.
제 생각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어떤 두려움과 무서움 상태에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무서움입니다.
요한복음의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닫아걸고 있습니다.
믿음이 크다면 주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제자들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은 주님을 때려잡은 유다인들이 두렵고 무서워
주님을 보고도 과연 주님일까 의혹이 일고 유령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너무 큰일, 끔직한 일을 당하게 되는데
그때 자라보고 놀란 사람 솥뚜껑보고도 놀라듯
예상치 않은 일이 또 발생하면 그것에 놀라며
아울러 과연 하느님은 계신가,
계시더라도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느님은 이런 것을 초월하시는 능력의 하느님이신가,
이런 의혹들이 우리를 몹시도 괴롭히게 되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런 상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에 제자들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지만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합니다.”
그런데 루카복음의 이 표현은 무슨 뜻입니까?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아직도 놀라워하다니요?
이것은 우리가 너무 기쁜 일이 생길 때 믿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겁니다.
만일 내가 로또 1등에 당첨이 되면 이게 꿈인지 생신지 의심이 가듯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너무 기쁘면서도 믿기지 않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은 이런 표현을 곧잘 합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이 너무 “근심한 나머지 잠이 듭니다.”
너무 근심이 되면 잠이 들지 말아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하는데 제자들은 그 반대입니다.
감당치 못하는 제자들의 인간적 한계를 나타내는 표현들입니다.
제자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고통도 감당치 못하고
죽음이라는 고통을 감당치 못하기에 부활이라는 기쁨도 감당치 못합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이런 감당치 못할 일들을 통하여 점차 감당케 될 겁니다.
루카복음은 분명하게 “아직”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합니다.”
아직까지는 이런 일들을 감당치 못하고,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지만
언젠가는 더 큰 고통이 닥쳐도 꿈쩍 않고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처럼
주님께서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셨다고 담대하게 믿음을 전할 겁니다.
그런데 그 “언젠가”가 언제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그 어떤 고통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의 때이고,
죽음과 부활을 다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의 때, 곧 성령강림의 때일 겁니다.
이것을 우리는 오늘 믿고 희망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