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불타는 가시 덤불 앞에선 모세
제작년도 : 6세기
소 재 지: 이집트, 시나이 산 성 카타리나 수도원 성당
세상에 아름다운 곳이 많지만 그중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관심을 끌면서 부각되는 곳으로 수도원을 들 수 있다. 현대에 있어서 수도 성소는 감소하는 추세인 반면, 수도생활이나 특히 수도자들이 남긴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이율배반적인 면이 있다. 이것은 우연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현대인들의 아쉬운 욕구를 채워주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해도 수도원은 어떤 현세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에 어떤 종교의 수도원이라도 맑은 마음의 흔적을 읽을 수 있으며, 이것은 혼탁하고 복잡한 삶을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좋은 쳥량제가 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주위 분위기에 편승해서 오염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수도원은 인간 삶의 고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는 좋은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 역사에서 일어났던 복음 운동 중 가장 탁월한 것은 바로 수도원 운동이며,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의 시작은 성화해설 52번에 나타나 있는 대로 복음을 철저히 살고픈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집트 광야에 모이면서 시작되었다. 시나이(Sinai) 산은 아래 성경에 나타나는 대로 모세가 하느님의 소명을 받은 장소이기에 하느님의 뜻을 외골수로 찾고자 하는 수도자들에게 더 매력적인 장소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모임으로서 수도원이 건축되었다.
현존하는 성녀 카타리나 수도원은 전설처럼 아름다운 사연에서 시작되었다. 서기294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Alesandria)에 가타리나 라는 고귀한 집안 출신의 처녀가 있었는데, 그는 총명하고 빼어난 미모의 여성으로 흠모를 받고 있었으나, 로마 제국이 반대하는 크리스챤으로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 부모를 위시해서 여러 주위의 사람들이 백방으로 신앙을 버릴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완강히 거부하자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천사는 이 고귀한 영혼이 머물 장소로 시나이 산을 선택하고, 그녀의 시신을 옮겨다 오늘 수도원 자리에 모시자, 여러 은수자들이 이 자리에 모여 들면서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이 사연을 들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안 (Justinian: 527- 565)에 의해 현재의 수도원 건물이 완공되었다. 이 수도원 성당 제단 정면에는 마태오 복음 17장 1-8절에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변모” 에 대한 모자이크가 있고, 그 윗부분 벽면 왼편에는 모세가 불타는 가시덤불 앞에서 신을 벗은 모습과 오른편에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작품은 출애굽기 3: 1- 10의 다음 내용을 형상화한 것이다.
“모세는 미디안 사제인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는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더니 야훼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떨기에서 불꽃이 이는데도 떨기가 타지 않는 것을 본 모세가 “ 저 떨기가 어째서 타지 않을 까 ? 이 놀라운 광경을 가서 보아야겠다” 하며 그것을 보러 오는 것을 야훼께서 보시고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하느님께서 부르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예, 말씀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리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하시고는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모세는 하느님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하느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셨다. “나는 네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 족과 헴족과 아모리 족과 브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으로 데려 가고자 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온다.”
이 수도원은 바로 모세가 위에 나타나고 있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은 장소일 뿐 아니라, 그 역사의 우여곡절 때문에 더 감동을 주면서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초세기 부터 모세의 여정에 동참하고픈 열정으로 정착한 수도자들은 크리스챤이었던 유스티아노 황제 시대까지는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나, 6세기부터 이집트가 무슬림 국가로 변하면서 이들은 적들에게 둘러 싸여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집트가 무슬림 국가로 변하면서 오랜 역사를 지닌 이집트의 많은 수도원들이 베두윈 족들에 의해 파괴되고 수도자들이 피살되면서 폐허로 남게 되었는데, 이 수도원만은 수도자들의 지혜로운 처신으로 천년 이상을 무슬림 틈바구니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무슬림과의 관계가 원만했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기에 수도원 건물구조가 적들의 위협에서 자기 방어를 위해 요새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이 이 성지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숙연함을 느끼게 된다.
이 어려운 여건에서도 이들은 수도생활에 정진하면서 많은 희귀한 성서 필사본을 남겼고, 2000점 이상의 수준급 성화상(ICON)을 보존함으로서, 1992년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고 세계 여러 수도원 가운데서도 가장 긴 역사와 함께 보물창고의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다.
모세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소명을 살아감의 여정이 어떤지를 명료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물에서 건져 낸 아이”라는 그 이름이 의미하듯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가정에서 태어나, 당시 이스라엘 세력의 확장을 두려워 한 이집트 정부가 만든 사내 아이를 죽이라는 명에 따라 죽임을 당할 처지에 있었으나 아기를 살리고자 한 어머니에 의해 나일강에 버려졌다. 운 좋게도 산책을 나온 이집트 공주에게 발견되어 왕궁으로 들어가 공주의 보호 속에 성장하면서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람세스 2세와 겨루는 실력자로 성장하게 된다.
물에 던져져 악어의 밥으로 사라질 생명이 이집트의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실력자가 되었으나, 자기 동족이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분노를 느껴 이집트인을 살해함으로서 그의 모든 인간적인 꿈은 물거품이 되면서, 왕궁을 떠나 광야로 와서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이 대단한 인생 역전의 과정에서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는데, 작가는 야훼 하느님은 이방인들이 믿던 우상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형상이 없으신 분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얼굴이 아닌 손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손의 모습은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을 드러내며 크리스챤들이 믿는 하느님의 중요한 속성 즉 인성과 신성을 지니시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이심을 상징하고 있다.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모세의 표정은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면서도 의아해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동족들을 해방시켜야 하는 사명을 승복하면서도 이것이 지금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의 시작임을 알기에 먼저 자기를 불러주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하느님께 당신이 누구시냐고 질문하자 하느님께서는 “ 나는 곧 나다”(출애굽 3: 14)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모세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자기를 불러주신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알자 아무 조건 없이 그분의 뜻을 따라 전혀 새로운 인생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데, 모세의 표정에 나타나고 있는 “경청과 의혹” 이것은 하느님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크리스챤들이 수용해야 할 기본 태도를 말한다.
모세의 표정은 자기가 이해하기에 너무 크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 인간이 건너야 할 의혹이라는 심연을 알리고 있다. 모세가 만난 하느님은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완전히 알기 어렵다는 불가해성이 더 선명히 드러나는 신비로운 분이시기에 경청하면서도 확신에 찬 표정이 아닌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이것이 믿음의 여정을 걸아야 하는 크리스챤 삶의 모습임을 전하고 있다.
출애굽기 3장 5절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발을 벗으라.“라는 내용이 있는데 우리 문화권에서는 이해가 힘든 말이다. 우리는 종종 탁발 수도자인 프란치스칸들이 공적인 예식에 맨발로 있음에 대해 의아할 때가 있다. 특히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제의를 입은 상태에서 보이는 맨발은 너무 생경스럽다 못해 불경이나 결례로 까지 보인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탁발 수도자들의 맨발은 깊은 상징적 의미가 있으며 그 근거가 바로 모세의 여정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집트 문화에서 신발은 권위와 직무의 상징이기에 파라오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을 보면 반드시 신발이 있으며, 왕좌에 앉은 파라오의 옆에는 반드시 그 신발을 놓아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배경 속에서 ‘신발을 벗어라’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 마치 낙원에서 알몸으로 지내도 부끄러움이 없던 아담과 이브처럼 (창세기 3장 11절) 하느님 앞에 아무 숨김없이 나가라는 표현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벗어던진다는 것은 겸손이고 자아포기의 행위이기에 하느님 앞에 서는 인간의 기본 태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신발은 대단한 보호의 상징이었다. 중세기까지 가난한 사람들은 신발을 신을 수 없어 맨발로 다닌 반면 귀족들이나 부자들만 신발을 신을 수 있었으며 이것은 신분 과시의 확실한 표식이 되기도 했다. 맨발로 걸을 때 그 불편과 위험은 말할 수가 없기에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라는 크리스챤 삶의 근본을 맨발이 상징하고 있다. 모세가 신발을 벗음으로 거룩한 땅에 완전히 받아들여진 것처럼 오늘 탁발 수도자들도 맨발을 통해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수도생활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다.
독일의 영성 심리학자인 Drewerman은 맨발의 상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세가 하느님 앞에 신발을 벗었을 때, 그가 하느님 앞에, 거룩한 땅위에, 온전히 자기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즉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거룩한 땅은 많은 민족들에게 잃어버린 낙원의 표지가 된다. 옷을 입지 않고도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수줍음이 없이 자신의 창조자 앞으로 나가는 일이 그런 낙원 국가에서는 가능하고 필요하다.”
우리는 종종 단순, 소박, 투명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보다 더 군덕지가 붙은 삶, 애매모호하고 복잡한 삶을 사려 깊은 것으로 착각하며 마치 이중인격자가 보일 수 있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탁발 수도자에 있어 맨발의 상징처럼, 하느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어떤 인위적인 것이나 현실 타협적인 것을 거부할 수 있는 단호한 결단이 바로 신발을 벗으라는 상징으로 드러나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모세의 맨발은 하느님을 향한 외골수 삶의 핵심적인 표현이요, 수행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오늘도 시나이 사막을 달리다 보면 마른 시내(Wadi)나 언덕 주위 가시덤불을 발견할 수 있다. 비가 내리지 않아 물이 귀한 곳이기에 마음껏 성장하지 못하고 바위틈에 붙어서 열악한 환경에서 힘겹게 연명하고 있는 가시덤불을 볼 수 있는데, 모세의 일화를 상기케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시덤불은 무가치하고 쓸모가 없는 잡초에 불과한데.모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순간 그의 삶의 모습이 바로 이 황량한 가시덤불과 같았다.
왕권을 겨루는 실력자로서 왕궁에 머물던 그가 홧김에 혈기를 이기지 못해 한 이집트인을 죽임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던 모든 미래의 희망이 무너지면서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사막으로 달아나 양을 치는 목자의 신분으로 변신되었다.
이집트 왕실에서 만날 수 있는 그 아릿답고 세련된 미인들을 뒤로 하고 미디안의 사제인 이드로의 딸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긴 했으나 이런 척박한 처지에서 태어난 자식은 희망이 없는 자식이기에 그의 이름을 “황무지에 사는 손님”이란 뜻의 “게르솜”으로 지었으니(출애굽 2:22) 그의 암담한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런 암담한 처지에 있는 모세에게 생명의 빛으로 나타나셔서 생기를 주셨다. 즉 자기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면서 방황하는 순간의 인간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신다. 하느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보인 불타는 가시덤불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신다는 표징이다.
모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순간에 있던 불타는 덤불은 그의 여정을 밝히는 새로운 이정표임과 동시 하느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빛나는 삶을 약속하는 표징이 된다.
물에서 건져지면서 공주의 아들이 된 우연한 행운으로 필사의 노력을 다해 얻은 모든 것을 다 상실한 모세는 재기의 희망이 없는 버려진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도 안에서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새롭고 빛나는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을 제시받게 된다.
크리스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누구에게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에 너무 부족한 나약함, 과거의 상처에서 연유하는 여러 결점, 바른 뜻을 펴기에 너무 열악한 환경 등이 내 삶을 속박하는 가시덤불의 장애 속에 살아야 하나, 이런 가운데서도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신발을 벗는 모세처럼 자기에게서 해방될 수 있을 때 아름답고 빛나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모될 희망이 있음을 작가는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카타리나 수도원에는 모세가 보았다는 불붙은 가시덤불에서 자란 새 나무가 수도원 한 켠에 소중히 보존되어 있는데, 다른 곳에 옮기면 살지 못하고 오직 그곳에서만 살 수 있다는 전설 같은 신성한 의미를 담아 많은 순례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마치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에 볼 수 있는 가시 없는 장미의 이야기, 즉 어느 날 성 프란치스꼬가 심한 육체의 유혹에 빠졌을 때 여기에서 헤어나기 위해 장미 밭에 몸을 던졌더니 그 후 부터 가시가 없어 졌다는 아씨시 뽀르치웅꿀라 수도원 정원에 있는 장미의 일화와 같다.
작가는 실재로는 더 없이 척박하고 초라한 모습의 떨기나무를 희망의 무지개처럼 화사한 색깔로 처리함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시작하는 인생의 밝은 면을 제시하고 있다. 시나이 산은 예나 오늘이나 풀 한포기 푸른 나무 하나 자랄 수 없는 황량한 돌산이며, 이곳에 있는 수도원은 외관상으로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중세 성채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 열악한 환경에서 하느님만 바라보며 1500년 이상을 살아온 수도자들의 삶은 마치 황토색 보다 더 붉은 모습의 시나이 산 처럼 믿음직스럽고 의연하게 보인다. 이 조그만 수도원에는 세계 최고의 도서관이 있으며, 성서학 발전에 대단한 기여를 했던 많은 성서 고사본(Codex)들이 보관되어 있어 하느님께 의지하며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든 수도원 문화의 소중함과 고귀함을 한껏 증언하고 있다.
1500년 이상 된 이 작품은 그동안 지진이나, 수리 과정의 실수 등으로 많이 훼손된 것을 현재 이탈리아 기술진에 의해 복원되고 있는데, 내년에 작업이 끝날 것으로 예상되며, 제단 전체 작품에 소요된 유리 조각은 약 50만점이 된다고 한다.
이 많은 돌 조각을 모아 성서의 내용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든 장인들의 정성은 관람객들을 감탄하게 만들며, 이 작품은 하느님의 업적을 전하고픈 신앙인이 표현할 수 있는 인간 정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