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요셉과 포티파르의 아내 (Joseph and Potiphar,s wife:1640- 1645)
작 가 : 뮤릴로 (Bartolome Esteban Murillo:1617-1682)
크 기 : 캠퍼스 유채 :197 X 254cm
소재지 : 독일 카셀(Kassel) 미술관
종교화를 대종으로 그렸던 작가는 특히 인물 묘사를 너무도 아름답게 함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림을 많이 남겼다.
그는 비록 당시 하류 사회에 속하던 인물들을 묘사하면서도 인간의 비참한 처지보다 척박한 현실에서도 그들이 보이고 있는 삶의 기쁨과 여유를 표현함으로서 인간적 가치를 탁월하게 묘사했다.
신약은 주로 교훈적인 내용이 대종이어서 인간 삶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것은 그리 폭넓지 않으나 구약은 인간 삶의 방대한 드라마를 전하고 있기에, 내용이 풍부하다.
표현에 있어서도 딱딱한 교훈적 내용이 아니라 세상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수한 표현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흥미 있는 내용이 많으며, 이 장면 역시 오늘도 대중 언론의 큰 관심의 주제가 되고 있는 남녀 간에 발생하는 치정 사건에 대한 것이다.
구약 저자들은 그 표현에 있어 현대적 표현법에 조금도 뒤지지 않을 만큼 어떤 교훈적인 관점보다 사실 묘사에도 파격적인 표현을 함으로서, 독자들의 관심을 끌게 만들고 있다.
창세기 후반부에 나타나고 있는 요셉이 상관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는 이 주제는 17세기 화가들에 있어 인기 있던 주제였다. 당시 대종이 종교화였던 현실에서 남녀 간의 치정 문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흥미 거리가 될 수 있었다.
작가 역시 이 작품은 초기 작품으로, 그 후에 원숙한 시기가 되었을 때 다시 이 주제의 작품을 남겼다.
이 내용은 구약 창세기 39장에 나타나고 있는 내용을 마치 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처럼 극적으로 표현했다.
요셉은 구약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인물 중 많은 이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그의 생애가 주는 교훈은 그의 성공적 삶에 있어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그 분을 향한 믿음 속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너무도 설득력 있게 전하는 것에 있다.
우선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어떤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자기 삶의 처지와 어떤 공감대를 느끼게 만들만큼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그는 행운을 타고 난 처지에서 인생을 시작했다. 아버지 야곱은 넉넉한 재산에다 지역 주민들로부터 신망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고, 많은 자식들이 있었는데, 이런 가정에서 요셉은 막내로 태어나 부모의 더없는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이 행운의 처지가 바로 요셉을 불운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막내 동생인 요셉이 그가 지닌 좋은 성격과 능력으로 부모와 이웃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 할수록 형들의 미움은 반대급부로 더 증폭되어, 급기야는 동생을 죽이고자 하는 집단 광기로 이들을 몰아넣었다.
동생을 해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형들은 양들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들로 나갔다가, 거기서 아버지 몰래 동생을 처지하기 위해 웅덩이에 밀어 던지고 염소의 피를 묻힌 요셉의 옷을 가지고 돌아와 동생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아버지 야곱은 통곡을 하면서 자기도 사랑하던 아들 요셉을 따라 저승으로 가고 싶다는 한탄 속에 슬픔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한편 웅덩이에 빠져 있던 요셉은 그곳을 지나가던 미디안 상인들에 의해 구조되어 은전 이십 냥에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
총명하고 수려한 용모의 요셉은 이집트에서 당시 파라오의 경호 대장이었던 포티파르의 종이 되었고,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성격과 자질에 의해 노예 신분에서 재산 관리인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어 대단한 신분 상승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경호대장의 부인은 남편의 지위가 주는 풍요 속에서 무위로운 나날을 보내며 관능에 대한 갈망을 채우고자 몸을 뒤척이던 차 좋은 먹잇감으로 요셉을 점찍게 되었다.
뛰어나게 수려한 용모에다 좋은 성격과 지성까지 겸비한 요셉은 이 부인에게 더 없이 매력적인 상대였다. 더욱이 요셉은 비록 남편의 신뢰와 총애로 좋은 자리를 확보했으나, 원래 신분은 속국인 히브리에서 끌려온 노예가 아닌가.
그러니 비록 자기에게 마음이 없더라도 자기 출세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자기 욕구를 순순히 받아들이리라는 치밀한 계산으로 요셉을 유혹했으나 그는 단호히 이를 거부한다.
창세기 39장은 경호대장이 출근하고 요셉만 집에 남은 처지에서 노골적인 추파를 던지며 요셉을 “함께 자요!” 라는 말로 유혹하여 침실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관능에 눈이 뒤집힌 여인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런 내용은 예나 오늘이나 평범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좋은 주제이다. 이 여인은 유부녀이기에 절제를 지켜야 할 처지임에도 자기 신분을 망각하고 관능적 욕구의 성취에 혈안이 되어 있다.
작가는 너무도 통속적인 “유부녀와 미혼남의 정사” 라는 통속적인 사건을 통해 성서적 가르침을 전달하고 있으며, 성서 역시 이런 인간의 어리석은 성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 내 집 창문에 기대어 창살 사이를 내다보다가 어수룩한 자들 속에서 누군가를 보게 되었다.
청년들 속에서 지각없는 젊은이 하나를 지켜보게 되었다.
여자는 안절부절 못하고 그 발은 집안에 붙어 있지 못 한다.
한번은 거리에 갔다가 한번은 광장에 가고 길목마다 지켜 선다.
이제 그 젊은이를 붙잡아 입 맞추고 뻔뻔스러운 얼굴로 말한다.
“ 내가 친교 재물을 바쳐야 했는데, 오늘 그 서원을 채웠답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맞으려 나와 당신 얼굴을 찾다가 이제야 찾아냈어요.
내 침상에 덮개를 갈았는데 화려한 이집트 산 아마포랍니다.
잠자리에 몰약과 침향과 육계향도 뿌렸어요.
자, 이제 우리 아침가지 애정에 취해 봐요, 사랑은 즐겨 봐요.
남편은 집에 없어요. 멀리 길을 떠났거든요.
돈 자루를 가져갔으니 보름날에나 집에 돌아 올 거예요.”
이렇게 갖가지 달콤한 말로 꾀고 매끄러운 입술로 유혹하니
그가 선 듯 그 여자 뒤를 따라 가는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고 벌 받으러 쇠사슬에 묶여 가는 미련한 자와 같다. 화살이 간장을 꿰뚫을 때 까지 목숨을 잃을 줄 모르는 채 그물 속으로 재빨리 날아드는 새와 같다. (잠언 7:6-7,11- 23)
호화롭게 꾸며진 침대에 앉아 요셉에게 손길을 뻗치고 있는 포티파르의 아내의 모습은 인간 삶을 파멸로 이끄는 위험한 것이기에 피해야 할 것임에도 가장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오는 관능의 끈끈함 속에 허우적대는 중생의 허망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에도 간혹 추파를 던지는 주인의 아내를 보고 그녀가 무었을 원하는지를 짐작은 했으나, 자기와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요셉이지만 반나체의 몸으로 침대로 자기를 끌어들이고자하는 여인을 보면서 상당히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원채 순수하고 절제심이 있는 그는 주인과의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단호한 말로 그녀의 유혹을 거부하며 여인의 곁을 박차며 떠나고 있다.
구약의 지혜문학에 속하는 잠언에는 다음과 같은 경구로 성적 유혹에 대한 경계심을 키우고 있다.
“그러니 이제, 내 아들들아, 내말을 들어라. 내가 하는 말에서 벗어나지 마라. 그 여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걷고 그 집문 앞에 가까이 가지 마라.” (잠언 5 : 7- 8)
유혹하는 여인의 음탕한 제안을 뿌리치고 침실을 박차고 나가는 요셉의 노랑색 외투를 여인이 붙들고 있다. 마치 자기 안에 솟구치는 욕정을 도저히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어리석은 중생의 처절한 몸부림과 같다.
노란색은 지옥에서 풍길 듯 한 매운 유황 연기의 색깔로 악마의 상징이다.
또한 노란색은 예수님을 배반했던 유다의 색깔로서 치욕의 색깔을 의미 한다.
요셉은 여인이 붙들고 있는 노란 망토를 찾을 생각을 않고, 과감히 앞을 향하는 모습에서 욕정에 눈이 어두운 여인의 유혹에 휘말려 하느님의 뜻을 배반하기보다 이것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서 하느님께 충실하겠다는 뜻을 대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의 표현은 남녀의 치정 관계라는 너무도 통속적인 주제의 접근으로 성서가 가르치는 절제와 유혹에 대한 권고를 주기에, 통속적인 호기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이 작품을 통해선 성서가 가르치는 진리로 접근하게 만들고 있다.
요셉의 이런 단호한 태도에 자존심이 상한 음탕한 여인은 요셉이 자기를 덮치려고 했다는 소문을 퍼트리는 것으로 복수를 했고, 아내의 말을 곧이 믿은 경호 대장은 너무도 분개해서 요셉의 모든 지위를 빼앗고 감옥에 가두었다.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웅덩이에 던져져 노예의 처지가 되었던 그가 이집트에서 높은 신분이 되었다가 이 음탕한 여인의 간계에 의해 다시 비참한 원점으로 돌아가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이집트 왕궁에서 일하던 두 사람의 꿈을 잘 풀어줌으로서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마침 파라오가 자신이 알 수 없는 꿈을 꾼 후 고민하던 중 요셉이 해몽을 잘 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통해 꿈을 해석하고, 그것이 맞아 떨어지자 당장 그를 나라 살림 전체를 맡을 재상으로 임명했다.
한마디로 그의 비극으로 시작된 인생이 더 없는 성공의 삶을 치닫으면서, 몽매간에 그리던 아버지 야곱을 포함해서 형제들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로 창세기는 끝나고 있다.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자기를 질투심 때문에 죽음의 함정에 빠트린 형들에게도 복수하지 않고 너그러이 용서한 요셉은 야훼 하느님의 자녀의 모델이 되었으며, 이 작품은 초기에 있었던 관능의 유혹을 극복한 요셉을 고귀한 인품의 성서적 인간상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구약의 지혜문학에서는 이런 유혹의 위험과 극복의 고귀함에 대해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간음을 저지르는 남자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가 나를 볼 수 있으랴? 어둠이 나를 감싸고 사방의 벽이 나를 숨겨 주니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내가 걱정하랴?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도 내 죄악들을 기억하지 못하시리라.’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이다.
그는 주님의 눈이 태양보다 만 배나 밝으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주님의 눈은 사람들의 온갖 행로를 지켜보시고 숨은 구석까지 낱낱이 꿰뚫어 보신다.
(집회 23: 18 - 19)
작가는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내용을 시각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어느 명 강론 못지않게 관객들에게 성서적 내용을 실감 있게 전하고 있다.
“네 욕망을 따르지 말고 욕심을 절제하여라. 네 영혼이 욕망을 채우도록 내버려 두면 너는 원수들의 놀림감이 되리라.” (집회 18 : 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