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비탄의 애도 (Lamentation) 1305- 1313)
작가: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1267- 1337)
크기 : 프레스코 200☓185cm
소재지 :이태리 파도바 스크로베니 경당
크리스챤 효심(孝心)이 낳은 걸작
부모를 향한 효심의 강조는 유교만이 아닌 모든 종교 교리의 주요 가르침인데, 그리스도교 역시 십계명에 명시되고 있으나, 크리스챤 신앙에 있어 효심의 강조는 불교나 유교에 비해 그리 강렬하지 못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효도를 만덕의 근본으로 가르치는 유교는 그만두고라도 불교에서도 중국 당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俓)은 자녀를 낳아 키우는 부모의 은덕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효도의 중요성을 전하고 있다.
여기에 비해 크리스챤 신앙은 오히려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의 최상 가치를 강조하다 보니 부모 공경에 대한 강조는 자연스럽게 차선에 머물게 되었는데, 교회 역사에서도 감동적인 효도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 있으며, 이 작품은 한 크리스챤의 효도 실천을 천상적인 사건으로 승화시킨 아름다운 내용이다.
성 안토니오의 유해를 모신 대성당이 있어 너무도 유명한 파도바(Padova)에 엔리고 스크로베니(Enrico Scrovegni)라는 부유한 귀족이 있었는데 ,그는 이 도시의 실권자로서 권력과 금력을 양손에 쥔 실질적인 군주였으나, 대단한 효심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 레지날드(Reginaldo)는 고리대금업으로 억척스럽게 번 많은 재산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당시 고리대금이라는 것은 오늘 우리 우리사회에 있는 가난한 사람을 높은 이자로 착취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금융업의 가치를 몰랐던 중세 사회에는 모든 돈거래를 다 고리대금으로 취급하여 대죄로 규정했기에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러 받은 이 경건한 귀족은 마음이 그리 편하지 않았다. 그는 지옥에 떨어질 큰 죄를 지은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성당을 지어 이것을 성모님의 이름으로 봉헌하기로 했다.
이 경당의 크기는 길이가 8.5m, 폭이 2.4m, 높이가 12.8m로 웬만한 큰 회의실 정도 크기의 작은 것이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온통 아름다운 색상으로 장식된 보석상자라는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효성 지극한 귀족의 부탁을 받은 작가는 이 보석 상자 안에 모두 53점을 그렸는데, 이중 39점은 예수 탄생 이전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주님의 일생을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연결시켜 관람자들에게 예수님의 일생 속에 몰입하게 만들고 있다. 이 경당은 이런 면에서 펼쳐진 성서로 볼 수 있다.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 프란치스코 생애에 대한 많은 작품을 남겨 유명한 작가 지오토는 서양 회화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화가 중의 한 명으로, 고틱 말기에 활동했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린 작가이다.
작가의 생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는 원래 양치기 소년이었는데, 바위에 있는 집에서 양의 모습을 완벽하게 스케치하는 방법을 스스로 개발해서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다. 10세 되던 해 당시 유명 화가였던 치마부에(Cimabue:1240~1302)에 의해 발탁되어 르네상스의 도시인 피렌체로 가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치마부에의 제자였지만 지오토의 작품 형태는 치마부에의 작품들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기존의 것을 흡수하여 새로운 형태를 창조해내었기에, 지오토의 뛰어난 재능은 단테가 그의 "신곡(神曲)"에서 아래와 같은 유명한 글을 쓰게 만들었다.
"그림에서는 치마부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지오토의 명성만이 높고 그의 이름은 희미하게 되었네...” 지오토는 당시의 유행하던 상투성에서 탈피해서 진실한 삶의 환상을 묘사했다. 또한 자연을 정확히 관찰해서 그려내는 자연주의를 예고하면서 그의 스승인 치마부에와 함께 현대 회화를 향한 디딤돌을 마련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장면은 요한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주님을 그린 것인데 다음 내용이다.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 점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언젠가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 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요한 19, 38- 42)
이 작품은 우선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님을 애도하는 분위기에 어울리게 세 개의 주제를 분리 설정하고 있다.
먼저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땅에 누인 주님을 애도하고 있는데, 그 수효가 아래 애도하는 군중과 같이 열명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다음 나무 하나 없는 긴 바위산이 황량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으며, 잎이 떨어진 앙상한 나무는 그리스도 죽음의 삭막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작가는 부활신앙이 주는 미래의 희망이라는 기대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상에 가져온 슬픔과 절망을 한껏 강조하고 있다.
하늘에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천사가 열명인 것처럼 지상에 역시 열명의 남녀가 주님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성서에서 열이란 숫자는 일곱 보다 더 완성된 숫자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계명이 십계명이고, 인간이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도 십일조로 규정하고 있다.
왼쪽에 나이가 지긋하게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서서 여인들의 슬퍼하는 모습을 지키고 있는데, 아리마태아의 요셉과 니코데모이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요한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의인으로서 나약한 심성의 소유자였기에 주님이 체포되는 순간은 제자임을 숨기고 있다가, 주님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자기 죽음을 위해 준비해두었던 무덤에 주님을 장사지낸 의인이었다. 그의 어깨에 걸린 흰 천은 주님의 시신을 처리할 아마포이며 또 다른 진실한 제자의 상징이다.
그 옆에 푸른 옷을 입고 서 있는 이는 요한복음 3장에 나타나고 있는 니코데모이다. 그는 바리사이였으나 형식적인 신앙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진리를 찾는 사람이었으며 어느 날 밤 주님을 찾아와 성령 안에 다시 태어나는 삶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회심한 제자이다. 그의 손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처리할 몰약과 침향을 담은 병이 들려져 있다.
둘은 서로 다른 인생을 산 사람들이었으나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는 형제이기에 평소에 충실했던 여인들 곁에 나란히 서서 그리스도 제자직의 의미성을 제시하고 있다.
가운데 죽은 예수님을 껴안고 있는 여인은 성모님이시다. 아들을 껴안으신 성모님과 어머니의 팔에 안긴 예수님은 무언의 대화를 하고 계신다. 성모님의 얼굴은 더 없는 슬픔에 잠겨 자기 아들을 바라보고 계신다. 어머니의 슬픔을 모르는 듯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다했단 안도감의 표정이다.
성모님은 어린 아들 예수를 봉헌하기 위해 성전에 갔을 때 예언자 시메온으로 부터 들은 말씀을 회상하시면서 어머니로서의 비통함을 드러내고 계신다. 루가복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 35)
그러나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 ”다운 기품을 지니고 계신다. 너무도 충격적인 장면 앞에 혼절한 여인이 아니라 흐트러짐이 없는 단아한 모습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지극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죽은 아들을 껴안고 계신 어머니로서의 성모님의 옷자락은 너무 단정하게 잘 정돈되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인간적인 충격에서도 깊은 믿음 안에 영글어진 그분의 고귀한 인품을 표현하고 있다.
성모님의 이런 모습은 스승의 충격적인 죽음 앞에 감정을 조절치 못하고 격렬한 몸짓으로 슬픔을 표시하고 있는 사도 요한과 대조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의 발치에는 성녀 막달레나가 못 자국이 선명한 주님의 발을 만지며 슬퍼하고 있다.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수난하시기 전 베타니아에 머무실 때 식사 중 어떤 여자가 값비싼 나르드 향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 드렸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주님의 수난을 미리 예고하는 상징이며, 이 여인을 막달레나라고 생각하면서 주님을 열렬히 사랑한 제자의 모델로 등장하고 있다. (요한 12, 1- 4) 그는 평소 열렬했던 주님 사랑을 상징하는 듯 붉은 옷을 입고 있으며, 다른 여인들과 달리 풀어 내린 머리가 주님의 발을 닦아드린 복음의 내용을 상기시킨다.
그 곁에서 주님의 왼손을 잡고 슬퍼하는 이는 마리아 클레오파이며 요한복음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함께 주님의 십자가 곁을 지킨 여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주위에 있는 여인들은 평소 주님을 따르며 뒷바라지 했던 여인들이다.(요한 19, 25- 26)
마리아 클레오파스 뒤편에 손을 들고 서 있는 젊은이는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요한 21, 20)로 불리던 사도 요한이다. 그는 제자단에서 나이로나 인생 경력으로나 가장 일천한 제자였으나 주님께 대한 사랑 하나는 너무 순수하고 강렬했기에 주님이 체포되는 순간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가는 처지에서도 끝까지 주님의 십자가 곁을 지킨 충실한 제자였다.
그의 주님에 대한 사랑의 상징이듯 성녀 막달레나와 같은 붉은 색의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비참한 죽음 앞에 슬픔을 가눌 수 없는 참담한 몸짓으로 팔을 뒤로 하며 스승을 바라보고 있다.
하늘에서는 열명의 천사가 모두 십자가에 내려진 주님을 향해 내려오면서 슬퍼하고 있다. 왼편에 있는 잎새가 다 떨어져 황량한 겨울나무의 모습은 일생을 혼신의 노력으로 키운 제자들도 다 배반하고 도망친 처절한 주님의 죽음의 비참함을 상징하는 듯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이 작품에는 주님의 시신을 지키는 열명의 제자들과 함께 하늘에서 주님의 죽음을 애도하며 내려오는 천사 역시 열명인데, 성서에서 열이란 숫자는 상징성이 있다. 지상에서 열명의 인간이, 하늘에서 열명의 천사가 애통하는 것은 주님의 죽음 앞에 우주가 애통한다는 의미가 있다.
“하늘이 울고 땅도 울었다는 ”격언처럼 걷잡을 수 없는 극단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성서에서 천사는, 처음에는 근동의 신화에서 발견되는 특성을 그대로 답습하면서도 서서히 하느님의 계시에 맞는 방법으로 적응시켰다.
즉 중근동의 개념처럼 천사는 군주인 하느님을 옹위하는 신하들이며, 그들 중에 케루빔은 하느님의 옥좌를 떠받치고 있으며 (시편 80, 2), 세라핌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사야 6, 3) 이처럼 천사들은 하늘의 모든 무리와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1 열왕 22, 19)
신약에 와서 주님께서 극적인 순간에 천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것을 볼 수 있는데, 광야에서 단식을 하시면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시고, 유혹이 끝났을 때 천사들이 와서 시중을 들었다는 내용이 있다.(마태 4, 11)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현실적인 참된 존재로 말씀하시며, 그들은 인간을 악과 위험에서 지키며 보호하면서 항상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다.” (마태 18, 10- 11)
천사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도 (루까 1, 19. 26.) 인간들의 보호도 담당하고 있다.(사도행전 12, 15) 이처럼 천사들은 지상과 천상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오른쪽 위에 있는 천사는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천사로서의 영적인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땅위에 누워 계신 그리스도를 향해 내려오면서 서서히 그의 표정은 인간들의 슬픔에 동참하면서 천상의 존재와 지상 존재의 장벽을 헐고 있다.
그 아래 작은 천사의 모습은 너무도 인간적이다. 그는 천상의 존재이면서도 그의 슬픈 모습을 통해 인간의 모습과 연결을 지우게 된다. 주님의 죽음 앞에 보이는 슬픔을 통해 천상의 존재와 지상의 존재는 일치하고 있으며 중간 아래의 작은 천사는 옷자락으로 눈물을 닦고 있다.
작가는 인간이 지닌 슬픔이라는 감정 표현을 통해 천상과 지상의 존재들을 하나로 일치시켰으며, 다른 작가와는 달리 부활에 대한 어떤 암시도 없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져온 그 슬픔을 통해 주님에 대한 인간의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다른 작가의 작품에는 항상 십자가의 죽음에 부활에 대한 예표가 제시되거나 부활이 암시되고 있으나, 이 작가는 인간의 감정 중 가장 맑고 순수한 표현이라는 슬픔이라는 자연스러운 정서를 통해 천상과 지상의 모든 존재를 주님께로 인도하고 있다.
이것은 초대교회 전례 찬가로 유명한 다음 성서 내용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자들이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필리피 2, 11)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금융업 차원의 돈놀이를 악질 고리대금으로 보면서 중죄로 다스렸던 중세기의 비현실적인 사고방식이 한 크리스챤의 효도를 통해 이토록 아름다운 걸작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은 부활찬송에 나타나고 있는 “복된 탓(Felix Culpa)”이라 여겨지면서 죽음 앞에서 천사와 인간들이 표시하는 슬픔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빛으로 다가온다.
모셔갑니다. ^^*
건강하세요.^^
저희 카페에 담아갑니다.
그림 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한 열 사람중 하나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욕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