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호르텐시오 파라비시노 수사( Fray Hortensio Felix Paravicino(1609)
작가 : 엘 그레코 (El Greco : 1541- 1614)
크기 : 캔버스에 유채: 112 X 86.1 cm.
소재지 미국 보스톤( Boston) 미술관
아름다움의 갈망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기에 이집트의 벽화에서부터 현대 예술에 까지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종교적 차원에서는 이런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허영이나 육체적 쾌락의 몰두로 이어지는 것으로 자주 거론되었으며, 성인 성녀들의 삶에서 볼 수 있는 영혼의 아름다움이나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한 강조가 보통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형상으로 세상에 오심으로서 육체를 지닌 인간의 아름다움은 신앙에서도 배제할 수 없는 현실적 요청이 되어 많은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기에 고심해 왔다.
이것과 함께 육신을 지닌 크리스챤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는 것도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생존하던 당시의 실존하던 인물의 초상화이며 신앙 안에서 영글어진 육체를 지닌 인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는 면에서 대단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호르텐시오 수사는 작가와 동시대를 살았던 삼위일체 수도회(Trinitarian)의 수도자였으며, 이 수도회는 당시 사회 여건에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수도회였기에 대단한 감동과 희망을 주던 수도회였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과 특히 당시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무슬림 교도들에게 잡혀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크리스챤 포로들의 석방을 목표로 1198년 말다의 성 요한(1150- 1213)에 의해 프랑스에서 창설되었는데, 이들의 활동에 의해 약 14 만명의 노예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
노예 해방이라는 것은 요즘은 그리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나 당시는 “벗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하신 주님 말씀의 실천과 직결되기에 당시 복음을 살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권고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수도회에 입회했고 엄격하고 고유한 규칙으로서도 당시 뼈대 있는 수도회로 인정받았다.
이작품의 주인공인 호르텐시오 수사(1580-1633)는 작가와 30년 이상의 나이 차이가 있으면서도 막역한 친구로서 아름다운 우정을 꽃피운 처지였다. 이 작품은 호르텐시오가 29세의 젊은 모습이며 작가는 이미 60이 되었을 때였다. 노예 해방을 목표로 하는 삼위일체 수도회 카리스마가 당시 비범했던 것처럼 주인공 역시 어릴 때부터 주위를 감탄시키는 비범한 사람이었다.
5세에 이미 라틴어를 익히고 21세의 약관으로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교육기관이었던 살라만카(Salamanca) 대학의 철학, 수사학 (Rhetoric) 전임 교수가 되었으며, 스페인의 실세였던 필립 왕가와도 대단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여기에 겹쳐 시인으로서 많은 아름다운 작품을 남겼으며, 사람들에게 대단한 감동을 주던 인기 있던 강론가로서, 한마디로 누구와 비길 사람이 없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처지에서도, 팔방미인의 포용성을 지녔기에 누구나 그를 부러워하는 처지였다. 또한 당시 그는 수도회의 총장직을 맡고 있었기에 한마디로 성속(聖俗)을 통틀어 대단한 두각을 드러내던 인물이었다.
여기에 비겨 작가는 그의 고집스런 작풍(作風)으로 왕실이나 귀족으로부터 소외된 처지에 있었기에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었으나, 예리한 감각을 지닌 호르텐시오는 자기에 비해 비운의 처지에 있는 작가의 자질을 인정하고 그의 예술가로서의 탁월성을 기리는 시를 지어 바침으로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처지와 나이를 초월한 깊은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작가는 여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남겼으며 작가가 생전에 그린 많은 유명 인사의 초상화 가운데 생애 말기의 작품이기에 작가의 인간 여정과 신앙 이해에도 큰 도움이 된다.
검은색과 희색으로 된 수도복을 입은 주인공은 의자에 앉아 있는데, 이것은 당시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기본 자세였으나, 작가는 주인공의 특징을 너무 잘 묘사했다. 우선 그는 수도회 총장이며 스페인 귀족사회에서도 선망의 대상이 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화려한 경력을 암시하는 어떤 장식도 없는 배경에 앉아 있다.
검은 색은 죽음의 상징이며 흰 것은 생명의 상징이기에 사도 바울로의 세례 신학에서 강조되는 것처럼 수도자의 삶은 매일 그리스도 안에 죽어 다시 태어나는 삶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무런 배경도 없이 검은 색과 흰색인 주위의 분위기가 그의 인격성에의 초점을 더 강조하고 있다.
주인공은 정면을 바라보면서도 시선을 누구에게도 두지 않고 심원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관객을 응시하는 것도 앞의 어떤 물체를 응시하는 것도 아닌 그의 모습은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고 차원 높은 이상을 살고 있는 주인공의 삶을 암시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가 말씀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시오”(콜로 3, 1)라는 말씀에 사로잡힌 인간의 모습이다. 지상에 육체를 두고서도 천상을 바라보는 고귀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의 얼굴은 그가 터득한 많은 세상의 지식이 줄 수도 있는 복잡함에서 해방되어 기도와 명상으로 다듬어진 인간이 오를 수 있는 높은 천상적 고귀함을 풍기고 있다.
주인공의 오른 손엔 두툼한 책이 쥐어져 있는데, 이것은 그가 지닌 폭넓은 교양과 지식의 상징이다. 그는 당시 사회가 강조하던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하였기에 대단한 지성인이었으며, 이 지성이 지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 승화되었기에 그는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지식인이 아니라 대단한 지성인이었다.
그가 들고 있는 두툼한 책은 주인공이 성 안셀모 ( S,Anselmo : 1033- 1109)가 말씀하신 "신앙을 찾는 지성"(Intelectus querens Fidem)과 “지성을 찾는 신앙”(Fides querens Intelectum)을 겸비한 인물이었기에 더 없이 풍요로우면서도 막힘이 없는 인물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아름다움 중에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효과적인 수단인 지성인데 주인공의 모습에서 이 두 요소가 너무도 잘 어우러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지성으로 다듬어진 신앙인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현대에서 사진을 찍을 때도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고치고 의자에 반듯하게 앉지만, 주인공은 전혀 다르다. 마치 아무 생각도 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듯 자유로우면서도 소탈한 모습이다. 귀공자적인 냄새를 풍기는 그의 용모가 줄 수 있는 경직감이나 거리감을 다분히 극복할 수 있는 소탈한 자세이다.
오른 손은 그의 앉은 자세처럼 아무런 긴장도 없이 축 늘어져 있어 더 없는 자유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손가락에는 신분을 표시하는 어떤 반지나 장식도 없기에 단조로울 만큼 평범한 그의 수도복과 의자와 어울리고 있다. 그는 의자 하나 외에 어떤 장식적 배경도 없이 앉아 있기에 대단한 수행으로 다듬어진 그의 고아하면서도 정신적 귀족으로서의 인격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주인공이 지닌 매력의 핵심적인 포인트로 십자가를 그렸다. 이것은 실제로 당시 삼위일체 수도자들이 사용하던 것이었는데, 주인공의 화려한 경력과 실력, 대단한 인기를 초월해서 표현하고 있는 주인공의 고귀함의 원천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는 사도 바울로처럼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사람으로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필립피 3,8)의 말씀이 바로 자기 인생의 좌표임을 제시하고 있다.
예나 오늘에나 화려한 경력이 있는 성직자들에게는 자기도취적인 성향에 사로잡혀 그의 외침과 실천이 다른 이중적인 삶을 살기도 쉽고, 여러 유혹의 올가미에 걸릴 수도 있는데, 주인공은 의연한 모습으로 시작과 끝이 한결같은 향기로운 인생을 살았다.
안부 자주 못드려 죄송합니다.
그 사이 감기로 고생하셨나봐요. 기도중에 기억합니다.
잘 보고, 모셔갑니다. ^^*
묵상하듯 천천히 읽고 옮겨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