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1903)
작가 : 케테 콜비츠 (Kathe Kollwitz:1867- 1945)
크기 : 동판화 17X 19cm.
소재지 : 독일 뒤셀돌프(Duesseldorf), 개인소장
성미술은 신앙의 내용을 시각에 의지하여 표현하는 것인데, 대부분 성서나 교회 역사에 나타나고 있는 교훈이나 사건들이 주제로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현대에 와서 인간 삶의 정황에서 만나게 되는 삶의 현실 제시를 통해 신앙적 의미를 확인하게 만드는 내용도 있는데, 작가의 작품은 성서적인 기원과 전혀 무관한 인간 삶에서 무심히 넘길 수 있는 사건들 안에 있는 깊은 의미를 크리스챤적인 신앙과 연결시키고 있다.
작가는 이런 면에서 현실 고발과 자신이 겪은 큰 아픔을 통해 신앙적 교훈을 이글어낸 대표적 작가이다. 작가는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 신자였으며, 가정 배경은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된다. 그녀는 당시 사회의 엘리트 계층에 속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는데, 가풍이 자유주의적 기질이면서도 신앙적 차원에서도 올곧은 실천을 하는 드문 집안이었다..
조부는 법관이었으나, 이런 사회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부조리와 비리를 보면서, 비리에 연루된 삶을 살기 보다는 깨끗하고 떳떳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결심으로 법관으로 사표를 던지고 목수로 전업해서 땀 흘리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녀의 외조부 역시 경건한 크리스챤으로서 교회가 다수가 된 곳에 생기기 쉬운 성직자들의 횡포와 교회의 비복음적인 권위주의에 항거하면서 인간의 자유와 양심의 가치를 존중했던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기를 풍기는 열심한 신자가 아니라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것을 실천함으로서 반듯한 삶을 살아가던 신자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작가는 의사인 남편과 결혼했는데, 남편 역시 확고한 크리스챤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서, 크리스챤으로서 인술(仁術)을 사명감으로 여겨 명예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베를린 (Berlin) 빈민가를 돌며 가난한 환자를 돌보는 데 헌신하며 예술가로서 아내의 삶을 전적으로 인정했기에 작가는 작품 세계에 몰두하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창출했다.
작품의 주제는 보통 인상파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정된 가정 출신의 여성들이 심취하게 되는 꽃과 아름다운 자연과 같은 인생의 아늑하고 밝은 면이 아니라 가난한 노동자, 빈민 등 억압당하고 수탈의 대상인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는 민초(民草)들이었으며, 또한 전쟁과 죽음과 같은 인생의 피할 수 없는 비극적 사건이었다.
인생의 즐겁고 기쁨에 넘치는 것과는 무관한 비탄과 고난을 형상화한 작가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녀를 사회주의 운동을 확산시킨 작가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신앙의 차원에서도 독특한 경지를 구축한 작가이다. 그녀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깊은 관계인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주제를 삶에서 피할 수 없는 파괴적이고 비극적인 현실인 전쟁이라는 주제와 연결시키면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어머니와 아들, 여인과 전쟁이라는 작가가 일생을 매달렸던 주제의 초기 작품인데,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주제처럼 어떤 어머니가 금방 죽은 것처럼 보이는 갓난 아기를 안고 너무도 슬픈 나머지 표현조차 잊은 듯 고개를 묻고 있다. 그녀의 몸매는 편안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여인에게서 볼 수 있는 세련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억센 농군의 아내처럼 남성적인 우람함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녀의 삶이 참으로 어렵고 척박했음을 보여준다.
여인의 침묵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의 폭풍이 지나간 후의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이다. 처음 여인은 숨이 끊어진 아기를 보며 미친 듯이 절규하면서 힘껏 껴안고 마치 다시 살리기 위해 인공호흡이라도 할 듯한 격렬한 몸짓을 보였다. 이렇게 절규하는 여인의 고통을 모르는 듯 아기는 평안한 자세이며 죽은 아기의 머리를 향해 강한 빛이 쏟아지고 있다.
이 여인의 침묵의 모습은 어떤 격렬한 몸짓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슬픔의 표현이다. 이 여인은 입을 열지 않고서도 어떤 동작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뼈저린 슬픔과 절망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치열한 전쟁 후 시체가 널부러진 시체들 위에 쏟아지는 햇빛처럼 인간의 비극 앞에 너무도 무심한 하느님을 고발하는 것 같은 분위기이다.
어머니의 너무도 안타까운 속수무책의 처지에서 침묵하는 모습은 십자가에 달려 마지막 고통을 겪으시는 주님께서 그토록 자기를 사랑하시는 성부께서 당신을 버리신 것 같은 절망 상태에서 부르짖은 다음 말씀을 연상시킨다.
“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었다. 이는 번역하면,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뜻이다”(마르코 15, 33).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것을 파괴하는 전쟁의 야만성을 고발했는데, 작품 제작 후 작가의 삶은 일생 이 주제를 따라다니면서 더 심화된 작품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일차대전 때 열 여덟 살이었던 아들 페타가 전쟁에 참가해서 전사하고 , 2차 대전 때는 손자가 종군해서 역시 전사하게 된다. 그의 아들이 애국심이라는 젊은이가 빠지기 쉬운 열기에 빠져 부모의 반대를 뿌리치고 입대하는 것을 보면서 작가는 이런 피맺힌 말을 남긴다. “아기의 탯줄을 또 한번 끊는 심정이다. 살라고 낳았는데, 이제는 죽으러 가는구나.”
아들과 손자를 전쟁에서 잃으면서 작가의 처지는 작품의 나타난 어머니처럼 지옥과 같은 고통에 시달리게 되지만 어머니로서 반전 작가로 다시 태어나면서 자기의 고통을 성모님의 고통으로 승화시켜 대단한 감동을 주게 되었다. 이때 남긴 < 전쟁은 이제 그만 >(1924)이라는 작품은 어떤 강론 보다 더 전쟁에 대한 경고성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작가가 남긴 다음과 같은 글은 작가의 작품 성향 이해와 함께 성서적인 내용과 연관 짖게 만든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즉 모든 악마적인 것들에 이제 질려 버렸다. 나는 작가로서 이모든 것을 깊이 느끼고 감동하면서 이것을 작품을 통해 표현할 권리를 느끼게 된다.”
작가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부조리를 고발한 반전 작가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새로운 방향 제시로 복음적 가르침에 대한 기억을 일깨운 작가로 볼 수 있다.
두 명의 사랑하는 자식을 전쟁에서 잃어야 했던 뼈아픈 어머니로서의 체험을 통해 승화된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노라면 다음 성서의 내용이 너무도 감명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 자 ,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의 집으로 !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 그분께서 민족들의 재판관이 되시고 수 많은 재판관들 가운데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만들지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야 2, 3- 4).
“모든 인간적인 것은 다 신적이다.”라는 말처럼 신앙의 내용을 통해 인간 삶에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듯, 인간 삶의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 특히 슬픔과 고통을 직시하다 보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교훈이다.
즉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성서적 진리와 만나게 되기에, 노동운동이나 현실 고발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작가의 작품은 크리스챤들에게 형식적인 신앙에 안주하고 있는 가정과 다른 비범한 삶을 살았던 작가의 가정처럼 깊은 신앙적 감동을 주고 있다.
작가는 성 미술의 관점에서 관객들의 관심을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놓았다고 볼 수 있다. 즉 지상의 사건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며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게 만들었다.
작가의 말년 작품에 피에타가 있다.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아들 예수님을 안은 성모님의 모습인데, 미켈란젤로를 위시해서 여러 작가들이 이 주제를 다루면서 가장 슬픈 성모자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만들고 있는데 작가의 피에타는 처음 작품의 완성작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베를린의 무명용사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서로를 죽이고 빼앗아야 승리 한다는 무모한 광기는 전쟁을 만들었고, 이 전쟁의 유지체제로 애국심이라는 것이 미화되면서 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앗았고, 많은 어머니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슬픔을 남긴 전쟁은 어떤 의미로든지 미화되지 않고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외치고 있다.
독일 역시 우리처럼 오랫동안 동족이 서로 전쟁을 했던 뼈아픈 역사를 지닌 나라인데, 복음이 강조하는 평화의 메시지는 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 앞에 서 있을 때 그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의 전쟁으로 사랑하는 아들과 손자를 잃어야 했던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다음과 같은 힘찬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될 말은 “댁의 아드님이 전사했습니다.”라는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는 소식이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평화를 실천하는 길이다.”
이 작품은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애송되고 있던 “통고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 축일의 찬미가를 성서로부터가 아닌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가장 깊은 인간관계에서부터 음미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아드님 십자가에 달려계실 때
성모님 바로 곁에 함께 계시며
슬픔에 마음아파 울고 계시네.
성모님 슬픔마음 찢어 지는듯
그 마음 예리한칼 꿰뚫었으니
탄식의 한숨소리 땅을 흔드네.
이렇듯 괴로우신 성모님보고
처절한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눈물이 없을 사람 어디 있으랴.
처참한 아들 함께 고통 참으며
눈물에 젖어계신 성모님보고
괴롭지 않을 사람 누가 있으랴.
아드님 고독하게 버려진채로
당신 숨 거두시며 운명하시니
성모님 두 눈에는 눈물 맺혔네
예수여 이 세상을 떠나가실 때
어머님 아파하심 굽어보시고
우리도 승리화관 씌워주소서. 아멘
제목 : 피에타 (Pieta) 1937
재료 : 청동
소재지 : 독일 베를린 무명용사 기념관
오히려 자식보다 더 무서운 고통으로 절망의 심연 속으로 잠겨듭니다.
저도 주님 마음에 드는 착한 딸이 되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