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맞는 말씀만 하십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가시나무가 무화과나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 맞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가시나무가 아니라 사람이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고,
나무에 대해서 한 말씀이라기보다 사람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지요.
다시 말해서 사람을 나무에 비유해서 하신 말씀이지요.
그런데 나무에 대해서 하신 말씀으로 들을 때는 편히 듣고,
‘음, 맞는 말씀이야!’라고 우리가 말하는데
나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고 나에게 하신 말씀일지라도 그렇게 할까요?
한 번 봅시다.
우선 나는 좋은 나무일까요?
좋은 나무, 나쁜 나무는 쉽게 구별이 되고,
‘너는 나쁜 나무야!’하고 말하더라도 나무는 반발하지 않고 받아들이는데
주님께서 나보고 나쁜 나무라고 하면 ‘맞습니다. 주님!’하고 받아들일까요?
그리고 나무가 발육이나 생장이 잘못 되어서 나쁜 나무가 되었다면
농부는 잘 발육하고 생장하라고 그 나무에 거름도 주고 가지도 치는데
주님께서 너는 발육과 생장이 잘못 되었으니
훈육도 받아야 하고 교정도 받아야 된다고 하시면 잘 받아들이겠습니까?
훈육과 교정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잘 받아들이시겠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더욱 문제인 것은 발육, 생장이 좋고 나쁜 나무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종자가 다른 나무의 문제입니다.
주님이 예로 들으신 것 같이 가시나무인 경우입니다.
가시나무는 열매는 없이 남을 찌르는 나무인데
나도 남에게 줄 열매는 없고 찔러대기만 하는 존재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런 존재라면 아예 종자개량을 해야 하는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종자개량을 요구하시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까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어제 개안수술을 요구하신데 이어
오늘 우리에게 종자개량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존재적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변화가 없는 겉치레 변화로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매우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그 자기중심성을 고치지 않으면
아무리 선행을 하려고 해도 그의 행위는 악행일 뿐이고,
안에 분노가 가득해서 가시 돋친 말을 쏘아대는 사람은
그 분노를 없애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의 말을 하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우리는 말실수를 한 뒤 입을 때리며 입의 가벼움이나 거칠음을 탓하는데
입에 무슨 죄가 있다고 입을 때립니까?
우리에게는 마음을 고치고 존재를 바뀌는 회개가 필요하고
비 복음적인 사람이 복음적인 사람으로 바뀌는 복음화가 필요하며,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다시 내어나는 세례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것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요한 크리스토모 축일이기도 합니다.
하도 설교를 잘하여 금구金口라고 불리기도 하였지요.
우리도 복음화되어 복음을 널리 그리고 잘 전하는 입들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