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돌고돌아 드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기도는 들어주시고, 어떤 기도는 안 들어 주시는가?
하느님은 누구의 기도는 들어주시고, 누구의 기도는 안 들어 주시는가?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가 불쌍하긴 하지만 그런 과부가 한둘인가?
계획도 없이 길 가다 우연히 마주쳤기에 구해주신 거라면 구원은 우연인가?
이런 질문은 우리의 일상생활 중에서 많이 드는 생각인데
제 나름대로 하느님의 구원 원칙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공평하시다.
-하느님은 각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하느님께서 혹 마음을 바꾸신다면 공동체가 원할 경우이다.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은사나 은총을 주셨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위해서다.
공평하심은 하느님의 본질에 속합니다.
공평하지 않음은 결핍이 있기 때문인데
하느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시다면 결핍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공평하지 않음이 결핍 때문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은 넘치는 사랑 때문에 자비하신 것인데
인간 존재가 어떠냐에 따라,
또는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느님의 자비가 달라진다면
결핍을 채우려는 인간의 사랑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옛날 광고에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여자가 남자를 조종할 수 있다는 말이고,
조종이 가능함은 그에게 아쉽고 필요한 것이 있다는 말이지요.
하느님은 이렇게 결핍 때문에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고,
그렇기에 사람하기에 따라 사랑이 달라지는 분도 아니시며,
당신의 넘치는 사랑 때문에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당신의 판단대로 각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각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각기 달리 주시는 것인데
그러나 그것이 사람의 눈에는 차별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당신 마음이나 계획을 바꾸지 않으시는가요?
구약을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을 바꾸는 것이 많이 나오고,
그리고 우리말에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물론 하느님의 계획은 바뀌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핍 때문은 아니고, 그 역시 사랑 때문입니다.
전에는 사랑 때문에 그 사람에게 무엇을 줘서는 안 되었는데
이제는 사랑 때문에 그것을 주는 것이 좋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엄밀히 얘기하면 하느님의 사랑이 바뀐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을 우리가 바뀐 것이지요.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그릇의 모양과 크기대로 담기는 것이고,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때에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공동체가 함께 청하는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고 주님 말씀하시고,
주님의 이름으로 같이 모인 곳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민심이 곧 천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슬픔에
고을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을 보시고 외아들을 살리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본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과부 개인에게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고 하며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고을 사람들은 과부의 슬픔을 개인의 슬픔으로 여기지 않고,
바로 자기들 모두의 슬픔으로 여기고 함께 슬퍼했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십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에 빗대어 얘기하면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을 개인의 아픔으로 여기지 않고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여기며 함께 기도해주는 것이고,
주님께서는 이런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랑으로 함께 청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들어주시는데,
그것을 들어주심은 바로 공동체를 위해서임을 오늘 복음은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