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 저희 수도원에서는 성월 기도를 바치고,
이번에 시복된 복자들의 생애를 매일 한 분씩 읽고 있습니다.
성월기도는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님과 동료 125위의 시복시성 기도인데
이번에 이 기도를 바치며 문득 이런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왜 우리 한국 교회는 성인들이 뭉텅이로 나올까?
103위 성인에다 124분의 복자가 탄생하셨으니 말입니다.
이런 생각은 그러나 너무도 잘못된 생각이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우리 순교자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데 그 많은 순교자에 비하면
이 숫자는 많은 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어지는 저의 문제의식과 문제제기는 성인들이 이렇게 많기에
우리는 성인들의 생애를 하나하나 잘 모르고 도매금으로 기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인들을 숫자로 기억하고 삶과 말씀으로는 기억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복자품에 오른 윤지충 바오로 순교자는 얼마간 알아도
같이 복자가 되신 지황 사바 순교자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이분을 이름으로라도 아는 분이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우리의 순교자들에 대해서 잘 모를까요?
기록記錄이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고,
기억記憶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러하기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제가 보는 우리 민족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록의 문화와 기억의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누군가가 기록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든 후세의 누구든
그것을 보고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거나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우리는 옛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 아니라
지워버리거나 잊어버려야 할 거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워버리다,’ ‘잊어버리다’는 우리말처럼
지우고 잊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서해 페리호 사건이 났을 때 떠들썩하고 재발 방지하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잊어버렸고, 재발 방지책은 세우지 않아 세월호 사건이 난 것처럼
기억에서 지워버림으로써 없애버려야 할 것이 계속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난 뒤 국민들은 잊지 않겠다고 너도나도 했지만
그리고 대통령도 눈물까지 흘리며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문제를 밝히기 위해 특검을 포함한 모든 걸 하겠다고 하였지만
시간을 끌면 잊기를 잘하는 국민들을 믿고 어물쩍 넘어가려고 합니다.
저는 제가 매우 미래지향적이라고 얘기하곤 합니다.
그래서 지난 일을 기억치 못하고 기록도 안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미래지향적이어야 하기는 하지만
그 미래지향적인 것이 기억하지 않는 미래지향이나
옛것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미래지향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지향이 온고지신의 미래지향이 되지 못하고
기억치 않고 그래서 옛것과 단절하는 미래지향이 될 때
버려야 할 나쁜 것은 계속 남고
끊임없이 지니고 되살려야 할 것은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찬례를 세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기념(억)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이처럼 무엇을 기억함은 그것을 행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순교 성인들과 복자들은 성경책이나 교리서나 신심영성 서적도 없는,
그러니까 신앙의 아주 척박한 환경에서도
그리고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도 가성직제도를 두면서까지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그대로 실행하고자 애썼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가진 것을 다 팔라는 주님 말씀대로 했고,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오늘 복음 말씀대로
가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 어느 것도 실천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순교자들을 기억하지 않거나 못한다면
마찬가지로 우리 순교자들의 삶과 정신을 뒤따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순교자들을 숫자로 기억하고 많은 성인을 둔 것을 자랑만 삼는다면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이 우리에게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