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편이 증거자임에 비겨 오른 편은 동정녀들의 무리가 어린 양을 경배하고 있다. 교회에서 동정녀들은 그들을 순결과 함께 이 세상 모든 욕망을 포기하고 주님만 따랐다는 면에서 피흘리지 않는 “흰색의 순교자”로 공경했다.
여기 동정녀들 역시 공주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을 망라하고 있으나 공통점은 주님만을 유일한 정배로 선택한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강조하기 위해 당시 처녀들이 쓰던 화관을 쓰고 있다.
앞부분에 성체를 모신 성광을 들고 계신 분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공경을 받던 성녀 글라라이시다. 성녀께서 아씨시 다미아노 수녀원에서 자매들과 함께 수도생활을 하실 때 사라센 군인들이 침공해서 수녀들의 동정에 위협을 받게 되었을 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기도를 바친 후 성광을 들고 창밖으로 내밀어 기도하시자, 사라센인들이 혼비백산하여 물러갔다는 일화에서 동정자들의 승리를 상기시킨다.
성령의 빛은 동정녀들을 비추고 있는데, 루카복음에 성모님이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들은 말을 연상시킨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 35)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성화의 일반적 표현은 중심인물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서양이 다 비슷한데, 불교 탱화에서도 중간에 석가모니불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 있는 보살 나한들이 다 부처님을 향하고 있으며, 시선을 다른 곳에 두는 사람은 마군(馬軍)인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순교 성인도도 역시 마찬가지 도상을 선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중앙 제대에 모셔진 어린 양에게 눈길을 두는 것 뿐 아니라, 어떤 이들은 서로를 응시하는 자세도 있다.
이 역시 현대 하느님 백성의 신학을 반영한 예언적인 표현이다. 신앙이란 하느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중심으로 형제들이 서로 주님 사랑 안에 어우러지는 수평적 차원을 포함하는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동정녀들의 무리 앞에 있는 관목에 피어있는 흰 꽃은 백합처럼 동정의 순결을 상징하고 있다.
에덴으로 상징되는 녹색의 정원에 있는 나무들은 한 지역에서만 피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방에 있는 것들을 모음으로서 천국은 이 세상의 어떤 한정된 공간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으로서 모든 이들을 포용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 뒤에 있는 당시 북구에 유행하던 형태의 성당은 묵시록의 마지막에 나타나고 있는 새 예루살렘의 상징이다. 이것은 악의 유혹을 이기고 승리한 사람들이 모이는 모든 크리스챤들의 희망 공간인데, 다음 성서의 말씀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이어서 천사는 성령에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도성은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 두 초석이 있었는데, 그 위에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묵시 21: 10-13)
묵시록은 이 세상의 유혹과 역경을 신앙으로 극복한 크리스챤들의 마지막 승리를 알리고 있는데, 작가 역시 마지막 승리의 환희와 희망을 제시하면서 대단원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 제단화는 열두 부분으로 되어 있고 이것은 그중 중요한 것의 한 부분이나 언제 시간이 있을 때 전체를 다 감상할 가치가 있는 대작이다.
기뻐하시지 않으실거예요.
비가내려요. 감기 조심하시구요...잘 읽고 옮겨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