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내리움 (1527년)
작가: 로쏘 피오렌티노 (Rosso Fiorentino, 1495-1540)
크기: 331X 190cm 켄버스 유채
소재지: 이태리 볼테라(Voltera) 시립 미술관
작가는 르네상스 후기를 대표하는 피렌체의 작가로 로마에 가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화풍에 영향을 받아 화려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다 독일 개신교도의 준동으로 시작된 "로마의 약탈"이라는 비극적 모습을 보고난 후 피렌체로 돌아가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그의 참신하고 생기있는 화풍에 매혹된 프랑스왕 프랑소와 1세의 요청으로 퐁테불로 궁전에 작품을 남기는 등 이태리 초기 메너리즘의 특징을 잘 표현한 작가였다.
매너리즘(Manerism)이란 일반적으로 형식주의, 기교주의, 독창성과 신선미를 잃고 틀에 박힌 경향이나 자세를 비판하면서 과감히 시도된 화풍이며 작가의 작품 역시 이런 면에서 이 경향을 전적으로 받아 들여 그의 작품은 다른 것에서 볼 수 없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그의 작품은 작가의 삶의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 작가는 준수하고 수려한 용모에다,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화술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으며, 해박한 철학 지식과 음악에 대한 수준 높은 교양으로 그의 작품과 그의 성격 자질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작가 이전에 너무도 매력적인 인간성과 자질을 지녔기에 많은 이들의 호응과 함께 질투의 대상도 되었다가 그의 작가로서의 자질을 시기하는 어떤 경쟁자에 의해 독살되는 비극적 최후를 마쳤으나 그의 작품은 오늘도 많은 사람들에게 매너리즘의 신선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성서의 다음 내용을 주제로 한 것이다. “낮 열두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을 덮어 오후 세 시경까지 계속되었다. 해가 어두워 진 것이다. 그때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두 개로 찢어졌다. 그리고 예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의 모든 친지들과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 보았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의회 의원이며 착하고 의로운 이였다...... 그는 유다인들의 고을 아리마태아 출신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 달라고 청하셨다.” (루까 23, 44-47;50-52)
더 없이 참혹한 죽음을 겪으신 예수님은 핏기 하나 볼 수 없는 처참한 죽음의 모습이다. 그분의 몸에는 수 많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핏자국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죽음 그 자체 외에 다른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작품에서처럼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다.
작가는 여기에서 주님의 처참한 죽음으로 이어지는 부활한 생명을 암시하고 있다. 주님의 죽음은 여느 인간의 죽음처럼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드러내고 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생명이 주님의 핏자국이 없는 얼굴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작가는 이 작업에 네 명의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맨 위쪽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은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아리마태아의 요셉이며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맨 위에서 이 작업에 조그만 차질도 없도록 대단한 주위를 기울이며 총지휘를 하고 있다.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은 비록 시신이나마 더없이 정성스럽게 다루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어져 혼신의 관심을 기울려 총지휘를 하고 있다.
다른 작품에서는 보통 사다리가 하나 있는데, 여기에는 두 개를 만들어 시각적으로 복잡성을 더하고 있다. 주님의 죽음은 철저한 인간적 실패의 더 없이 침통한 모습이나 그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상기시키기 위해 등장인물들이 대단히 역동적으로 일하게 만들었다.
마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소리가 눈 덮인 개울 아래에서부터 들리는 것처럼 작가는 생명이 없는 예수님의 시신 주위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통해 꿈틀거리는 주님의 새 생명에로 관객들을 초대하고 있다.
아리마태아의 요셉 바로 밑에서 주님의 등 뒤에서 작업중인 인부에게 손을 뻗쳐 작업지시를 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리마태아 요셉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더 없이 열정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서 십자가 곁에는 장례식의 암울함 보다 생명의 축제를 시작하는 분위기이다.
십자가 아래 두 여인이 극도의 슬픔에 잠긴 성모님을 부축하고 있으며,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땅에 엎드려 성모님의 무릎을 붙들고 있다. 성모님을 부축한 두 여인은 주님의 선교 여정에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뒷바라지를 했던 부인들이고 아래 있는 여인은 주님을 너무도 사랑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이시다.
성모님은 다른 여인과 달리 검은 베일로 몸을 가리고 더 없이 침통한 모습으로 계신다. 성모님의 검은 옷과 대조적으로 양옆에 있는 여인과 마리아 막달레나가 밝은 옷을 입고 있는데,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성모님의 고통을 지켜보는 반면, 밝은 노란 옷을 입은 여인은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관객들의 시선을 유도해서 성모님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초대의 자세이다. 르네상스 미술에서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와 동시에 인간 예수의 어머니로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인간적인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고 있다. 어머니로서의 마리아가 아들 예수님의 죽음 앞에 애통해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이 보여야 할 연민의 대표적 자세이다.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슬픔을 이길 수 없어 얼굴을 가린 자세를 하고 있다. 이런 주제의 다른 작품에선 항상 사도 요한을 붉은 옷을 입혀 주님을 향한 열렬하면서도 순수한 사랑을 상징하고 있는데, 작가는 이런 고답적인 것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주님을 시중들던 부인과 같은 색깔로 조화시키고 있다.
보통 성모님과 함께 십자가를 우러르며 슬픔을 표시하는 것과 달리 얼굴을 가린 채 슬픔을 표시하는 이 자세는 작가가 1521년경 로마의 시스티나 경당 벽화 작업을 할 때 "낙원에서 추방"이라는 작품에 드러나는 아담의 재현 모습이며 이것은 작가가 자신의 자화상으로 남긴 것으로도 여겨진다. 당시 작가들은 작품의 등장 인물 중에 자신의 자화상을 담는 습관이 있었는데, 작가도 이런 관점에서 사도 요한의 모습에 자신을 담았다.
요한이 이토록 슬퍼하는 곁에는 어떤 하인이 십자가를 붙들고 있다. 그는 주님을 잃고 슬퍼하는 요한과 전혀 다르게 무표정한 얼굴로 십자가를 붙들고 있다. 신앙의 무관심의 현실에 대한 경각심을 주고 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분의 죽음은 너무 충격이고 큰 슬픔이나 이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더 없는 기쁨을 누리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에겐 예수님의 구속 공로가 무용지물이 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십자가와 함께 보이는 암울한 청색의 하늘은 성모님과 사도요한 성 부인들의 슬픈 마음을 반영 하는 듯 힘없어 보이나 예수님의 시신을 내리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일꾼들의 역동적인 모습에서 죽음을 뛰어 넘는 부활한 생명의 생기가 서서이 등장하고 있다.
틀에 잡힌 것으로 작품을 구상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작가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주제가 주는 슬픔을 담기 위해 기존 작가들이 사용했던 정적인 기법에서 탈피해서 색체나 동작에 있어 동적인 기법을 사용함으로서 다른 작가들이 주지 못하던 감동을 선사할 수 있었다.
작가: 로쏘 피오렌티노 (Rosso Fiorentino, 1495-1540)
크기: 331X 190cm 켄버스 유채
소재지: 이태리 볼테라(Voltera) 시립 미술관
작가는 르네상스 후기를 대표하는 피렌체의 작가로 로마에 가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화풍에 영향을 받아 화려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다 독일 개신교도의 준동으로 시작된 "로마의 약탈"이라는 비극적 모습을 보고난 후 피렌체로 돌아가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그의 참신하고 생기있는 화풍에 매혹된 프랑스왕 프랑소와 1세의 요청으로 퐁테불로 궁전에 작품을 남기는 등 이태리 초기 메너리즘의 특징을 잘 표현한 작가였다.
매너리즘(Manerism)이란 일반적으로 형식주의, 기교주의, 독창성과 신선미를 잃고 틀에 박힌 경향이나 자세를 비판하면서 과감히 시도된 화풍이며 작가의 작품 역시 이런 면에서 이 경향을 전적으로 받아 들여 그의 작품은 다른 것에서 볼 수 없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그의 작품은 작가의 삶의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 작가는 준수하고 수려한 용모에다,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화술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으며, 해박한 철학 지식과 음악에 대한 수준 높은 교양으로 그의 작품과 그의 성격 자질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작가 이전에 너무도 매력적인 인간성과 자질을 지녔기에 많은 이들의 호응과 함께 질투의 대상도 되었다가 그의 작가로서의 자질을 시기하는 어떤 경쟁자에 의해 독살되는 비극적 최후를 마쳤으나 그의 작품은 오늘도 많은 사람들에게 매너리즘의 신선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성서의 다음 내용을 주제로 한 것이다. “낮 열두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을 덮어 오후 세 시경까지 계속되었다. 해가 어두워 진 것이다. 그때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두 개로 찢어졌다. 그리고 예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의 모든 친지들과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 보았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의회 의원이며 착하고 의로운 이였다...... 그는 유다인들의 고을 아리마태아 출신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 달라고 청하셨다.” (루까 23, 44-47;50-52)
더 없이 참혹한 죽음을 겪으신 예수님은 핏기 하나 볼 수 없는 처참한 죽음의 모습이다. 그분의 몸에는 수 많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핏자국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죽음 그 자체 외에 다른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작품에서처럼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다.
작가는 여기에서 주님의 처참한 죽음으로 이어지는 부활한 생명을 암시하고 있다. 주님의 죽음은 여느 인간의 죽음처럼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드러내고 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생명이 주님의 핏자국이 없는 얼굴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작가는 이 작업에 네 명의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맨 위쪽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은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아리마태아의 요셉이며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맨 위에서 이 작업에 조그만 차질도 없도록 대단한 주위를 기울이며 총지휘를 하고 있다.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은 비록 시신이나마 더없이 정성스럽게 다루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어져 혼신의 관심을 기울려 총지휘를 하고 있다.
다른 작품에서는 보통 사다리가 하나 있는데, 여기에는 두 개를 만들어 시각적으로 복잡성을 더하고 있다. 주님의 죽음은 철저한 인간적 실패의 더 없이 침통한 모습이나 그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상기시키기 위해 등장인물들이 대단히 역동적으로 일하게 만들었다.
마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소리가 눈 덮인 개울 아래에서부터 들리는 것처럼 작가는 생명이 없는 예수님의 시신 주위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통해 꿈틀거리는 주님의 새 생명에로 관객들을 초대하고 있다.
아리마태아의 요셉 바로 밑에서 주님의 등 뒤에서 작업중인 인부에게 손을 뻗쳐 작업지시를 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리마태아 요셉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더 없이 열정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서 십자가 곁에는 장례식의 암울함 보다 생명의 축제를 시작하는 분위기이다.
십자가 아래 두 여인이 극도의 슬픔에 잠긴 성모님을 부축하고 있으며,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땅에 엎드려 성모님의 무릎을 붙들고 있다. 성모님을 부축한 두 여인은 주님의 선교 여정에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뒷바라지를 했던 부인들이고 아래 있는 여인은 주님을 너무도 사랑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이시다.
성모님은 다른 여인과 달리 검은 베일로 몸을 가리고 더 없이 침통한 모습으로 계신다. 성모님의 검은 옷과 대조적으로 양옆에 있는 여인과 마리아 막달레나가 밝은 옷을 입고 있는데,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성모님의 고통을 지켜보는 반면, 밝은 노란 옷을 입은 여인은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관객들의 시선을 유도해서 성모님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초대의 자세이다. 르네상스 미술에서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와 동시에 인간 예수의 어머니로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인간적인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고 있다. 어머니로서의 마리아가 아들 예수님의 죽음 앞에 애통해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이 보여야 할 연민의 대표적 자세이다.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슬픔을 이길 수 없어 얼굴을 가린 자세를 하고 있다. 이런 주제의 다른 작품에선 항상 사도 요한을 붉은 옷을 입혀 주님을 향한 열렬하면서도 순수한 사랑을 상징하고 있는데, 작가는 이런 고답적인 것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주님을 시중들던 부인과 같은 색깔로 조화시키고 있다.
보통 성모님과 함께 십자가를 우러르며 슬픔을 표시하는 것과 달리 얼굴을 가린 채 슬픔을 표시하는 이 자세는 작가가 1521년경 로마의 시스티나 경당 벽화 작업을 할 때 "낙원에서 추방"이라는 작품에 드러나는 아담의 재현 모습이며 이것은 작가가 자신의 자화상으로 남긴 것으로도 여겨진다. 당시 작가들은 작품의 등장 인물 중에 자신의 자화상을 담는 습관이 있었는데, 작가도 이런 관점에서 사도 요한의 모습에 자신을 담았다.
요한이 이토록 슬퍼하는 곁에는 어떤 하인이 십자가를 붙들고 있다. 그는 주님을 잃고 슬퍼하는 요한과 전혀 다르게 무표정한 얼굴로 십자가를 붙들고 있다. 신앙의 무관심의 현실에 대한 경각심을 주고 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분의 죽음은 너무 충격이고 큰 슬픔이나 이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더 없는 기쁨을 누리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에겐 예수님의 구속 공로가 무용지물이 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십자가와 함께 보이는 암울한 청색의 하늘은 성모님과 사도요한 성 부인들의 슬픈 마음을 반영 하는 듯 힘없어 보이나 예수님의 시신을 내리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일꾼들의 역동적인 모습에서 죽음을 뛰어 넘는 부활한 생명의 생기가 서서이 등장하고 있다.
틀에 잡힌 것으로 작품을 구상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작가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주제가 주는 슬픔을 담기 위해 기존 작가들이 사용했던 정적인 기법에서 탈피해서 색체나 동작에 있어 동적인 기법을 사용함으로서 다른 작가들이 주지 못하던 감동을 선사할 수 있었다.
나만큼 아팠느냐?라고 물으시는것 같았어요.
"아니요..."라고했는데 그래도 그게 서럽던걸요.
신부님께 감사드리며 그림 옮겨갑니다!
위의 사도 요한의 표기중 오류가 아니신지 세례자 요한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