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의 보호자 어머니 (1937)
작가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
크기 : 29.8 X 34.9 cm 철판 유화
소재지 :멕시코 돌로레스 올메도(Dolores Olmedo) 재단
맨발의 무용수로서 유럽 무용계에 신화적인 역사를 남긴 이시도라 던컨(1877- 1927)과 함께 지난 세기 불꽃 같은 인생을 산 여인의 한 사람이었던 작가는 작품 활동을 통해 여성성의 고귀함을 고취시킨 여성 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생애는 그의 작품만큼 강렬하고 치열한 시대적 배경을 살았다.
작가는 1907년 멕시코 유태계 독일인 아버지와 스페인과 인디오의 혼혈(메스티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세 살이 되던 해인 1910년 멕시코에서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은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보다 7년이나 앞서는 것으로 디아스 독재정권의 지나친 노동자와 농민 착취에 항거하여 일어났다.
이처럼 작가가 성장하던 시기는 혁명의 열기가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작가는 6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가 불편했지만 총명하고 아름다운 소녀로 유복한 환경에서 꿈 많은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18세에 다시 심한 교통사고를 당함으로서 의사가 되고픈 그의 인생은 완전히 부서지게 된다.
그녀는 이 사고로 자신은 ‘다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고 표현했다.
아무 것도 꿈꿀 수 없는 절망의 시간들이 꿈 많은 소녀를 덮쳤다.
이런 절망적인 처지에서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 두 손만 자유로웠던 칼로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이런 이상한 인연에 의해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면서 그는 당시 멕시코에서 벽화 제작과 분방한 생활로 젊은이들 사이에 우상의 자리에 있던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 1886- 1957)와 가까이 하면서 예술에 대한 더 구체적인 열망이 커지고, 21세나 연상인 그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나의 평생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작가의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리베라와의 결혼은 운명이고 필연이었지만, 그것이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리베라는 결혼생활 동안 칼로의 삶 전체를 지배했고, 고독과 고통에 피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기를 갖고 싶었지만 건강 때문에 몇 차례 유산을 하면서 끝내 아기를 갖지 못하는 아픔을 되새겨야 했다.
몇 차례의 유산은 모성을 가진 여성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절망감을 더해주었으며, 모성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그림으로 승화되기 시작했다.
칼로는 멕시코 전통 속에 자신이 운명적으로 겪어야 했던 고독과 고통을 녹여내어 그 어떤 미술 범주에도 들지 않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초현실주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으나, 이것은 피상적인 관점일 뿐 작가의 작품은 너무 독창적이어서 어디에 넣을 곳이 없다.
두 차례의 사고로 온 몸이 부셔진 불구의 고통,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 여성으로서 어머니가 될 수없는 절망적 슬픔을 그는 예술을 통해 승화시켰다
지옥과도 같은 육체적 고통이 그녀를 내리 찍어 그림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처지에서 그는 미친 듯 자신의 작품에 몰두했다.
사랑과 혁명이 그의 작품 전체를 흐르고 있으며 그의 작품은 멕시코의 태양 만큼이나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1954년에 불과 47세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한 작가는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다시 한번 세계인들에게 재발견되었다.
그녀의 작품이 표현하는 솔직 담백한 여성성과 섹슈얼리티를 후세의 페미니스트들이 높이 평가한 것이다.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성을 가장 심원하고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예수 아기를 안은 성모님의 모습이다.
역사 안에서 여러 문화를 배경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으나, 서방 백인 문화에서의 표현이 대종이었기에 성모자를 생각하면 즉시 크리스챤 전통의 백인 문화의 관점으로 보게 된다.
성모자의 표현은 단순히 어떤 특정 종교의 신앙 표현임을 넘어 성모님의 존재성을 인정치 않는 광신적 성향의 개신교도들 외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것은 종교 이전 인간의 가장 깊은 바탕에서 영근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원초적 관계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전통적 서방 백인 위주의 표현과 전혀 다르게 그녀의 인생을 성장시킨 멕시코의 대지를 바탕으로 모성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여인은 서방 세계의 감각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너무도 생경스럽고 미개인처럼 보이는 검은 여성이며 아기를 안고 있는 그녀의 밑바탕 역시 검은 색이다.
이 검은 색이 바로 멕시코 인디언 신화에 나타나는 모성의 상징이다
즉 땅은 하늘로부터 내린 씨앗을 받아 들여 발아시키면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못자리이다.
작가는 이것을 바로 생명의 원천인 모성의 근원으로 표현했다.
생명과 검은 색깔은 뭔가 어울리지 않지만 작가는 땅의 상징으로 검은 색을 사용해서 여성성의 뿌리를 강하게 강조한 후 멕시코 평원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는 생기 넘치는 열대 식물들을 통해 생명의 생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서방 예술의 관점에서 너무 생경스러운 작가의 작품은 멕시코 인디언 복음화에 큰 견인차 역할을 했던 과달루베(Guadalupe)의 성모 신심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멕시코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1531년 아침 미사에 참석하던 인디언 소년인 후안 디에고 (Juan Diego)라는 어린이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은 그의 외투에 당신 모습을 새겨 주셨다.
인디언 어머니의 모습으로 새겨진 이 성화는 멕시코 토착민들의 복음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멕시코 인들을 각별히 보살펴 주시는 성모님의 이미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오늘은 멕시코인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순례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작가는 멕시코 인들에게 깊이 각인된 과달루베 성모 신심과 멕시코 토착 신화를 접목시켜 가장 멕시코 적이기에 세계인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성모자를 그릴 수 있었다.
멕시코 여인의 품에 안긴 아기는 전통적인 예수 아기가 아니라 바로 작가의 어린 시절 모습이다.
어머니는 인디언의 피를 받은 스페인 혈통의 멕시코 여인이고 아버지는 서방 혈통의 남성이었던 작가는 멕시코 인의 모습이 동방과 서방이 완벽한 융합의 상징으로 여겼기에 세상 모든 인간들을 포용할 수 있는 구세주의 모습으로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검은 어머니의 품에 안긴 백인 모습의 작가는 검은 머리칼이나 다른 용모의 인상에서 멕시코의 토착성을 물씬 풍기고 있다.
아기가 입은 고급스런 흰옷과 대조되는 인디언 모습의 아기는 모든 인류를 한 형제 자매로 포옹하기 위해 오신 구세주의 또 다른 상징이다.
아기를 안은 여인의 드러난 오른쪽 젖가슴은 너무도 풍만한데, 여기에서 생명을 키우는 모성의 상징인 젖이 아기를 향해 떨어지고 있다.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닌 아기의 몸을 향해 떨어지는 것은 모성의 가치와 존재성은 아기 생명의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 공급 차원 이상의 전인적 성장을 겨냥한다는 표현이다.
작가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유복한 가정배경에서 태어나 총명한 자질을 지녔기에 장래가 보장되는 삶을 보장받았으나, 그 후 그녀가 겪어야 했던 어처구니없는 재앙들로 장미 빛 꿈으로 부풀은 그의 인생이 깡그리 박살난 처지었다.
여기 그려진 어머니의 풍만한 젖은 그녀에게 절망을 내딛고 화가로서의 꿈을 일깨운 것 뿐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탓이 아니게 당해야 했던 운명적인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치유와 위로의 역할까지도 암시되고 있다.
어머니 사랑은 아이에게 육체의 성장만이 아닌 정신적 치유와 격려를 할 수 있는 전인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젖으로 표현되는 어머니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은 아기는 입으로 생명의 상징인 나무를 불어내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인 아기 예수께서 인간인 마리아의 사랑 안에서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줄 하느님의 아들로 성장하신 것처럼 너무도 멕시코 냄새를 물씬 풍기는 토속적인 여인의 품에 안긴 아기는 젖으로 표현되는 어머니의 엄청난 사랑의 힘에 성장해서 이 세상에 더 없이 깨끗하고 밝은 생명을 탄생시키고 있다.
아기는 사랑 속에 성장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이중의 역할을 조화롭게 하고 있다.
작가는 멕시코라는 신앙의 풍토에서 태어났으나, 그 당시 여느 지식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개인적으로 신앙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생명에의 강렬한 갈망은 어쩔 수 없이 성모자를 통해 투사되면서도 이것이 어떤 이론적인 바탕이 아닌 자신의 성장배경과 연결되면서 더 큰 생명에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성모자의 모습으로 귀착되었다.
성미술의 토착화는 여러 지역에서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열심한 교우였던 루이스 장발 (1901- 2001) 님이 동경 미술학교를 졸업 후 최초로 미국 콜럼비아 대학에서 공부하시고 귀국해서 성미술 분야의 활동을 많이 하셨으며 그리 많지 않는 그분 작품 중에 명동 대성당 제단 부분의 12사도상은 석굴암 관음상을 연상시키는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미술의 토착화는 우리 처지에서도 시급한 현실인데, 우리에게는 너무도 아름답고 역사 깊은 불교 미술에서 많은 것을 도입할 수 있는 좋은 가능성이 있다.
인도와 중국을 거쳐 이 땅에 전래된 불교 미술은 8세기에 석굴암이란 걸작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는데, 일본 학자인 ‘야나기 소에스’는 다음과 같은 찬사를 남겼다.
"이것은 단순히 한 나라의 제작이 아니라 실로 수(隋)나라, 당(唐)나라로 이어진 중국 불교의 결정이요, 나아가서는 동양의 종교와 예술의 귀결이었다."
몇년 전 어떤 외국 선교사가 쓴 "한국 교회의 성모 신심과 관음(觀音) 신앙의 영향"이라는 석사 논문에서 한국 레지오 활동이 어느 나라 보다 활성화된 것은 불교에서 가르치는 관음 보상에 대한 이미지가 성모님께로 자연스럽게 전이된 것에 원인이 있음을 제시한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아름다우면서도 타당성 있는 이론이란 생각이 든다.
석굴암의 관음보살은 사랑과 아름다움을 지닌 거룩한 처녀상이기에 가톨릭 신자라면 자연스럽게 이것을 성모 공경으로 수용할 수 있다.
몇년 전 가톨릭 작가인 최종태(바오로)님이 불교 사찰인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 관음 보살상을 제작했는데, 이 관음 보살상은 성모님의 모습을 너무 닮아 그 앞에 기도하기에 조금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
길상사 스님들의 열린 마음을 함께 읽을 수 있어 더 기분이 좋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유럽 성미술의 복사가 아닌 우리의 전통 문화와 종교의 바탕에서 영글은 성미술에 대한 더 심원하면서도 과감한 시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우리에게 성미술 토착화에 대한 열망과 용기를 주고 있다.
그래서 작가에 대해 검색해보고 어떤 사람인지 조금 알았었어요.
벌써 대림시기가 오고 있어요.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