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어린이들을 내게로 오게하라 !(1884)
작가: 프리즈 폰 우드 (Fritz Von Unde: 1848- 1911)
크기 :켐퍼스 유채: 188 X 290cm
소재지 :독일 베르린 미술관
18세기 영국이 낳은 유명한 낭만파 계관시인이었던 윌리엄 워즈우스( William Wordsworth: 1770- 1850)는 "어린이는 어른들의 아버지"라는 말을 했는데 , 이것은 인생의 진실을 바라보는 사람에겐 의미 있는 말로 여겨지면서 오늘까지도 어린이들에 대해 잊기 쉬운 아름다운 기억을 일깨우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린이의 존재성에 대한 것 이상의 하느님의 모습을 닮고자 하는 크리스챤의 삶에서 어린이의 중요성에 대한 기억을 다름과 같이 일깨우고 있다.
성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 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난후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마르코 10: 13 - 16)
이 작품은 다른 성화와는 달리 지상 예수님의 삶을 집중적으로 표현함으로서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인간 예수의 모습을 통해 오늘 우리들의 일상 삶에 방향을 찾게 만든다.
작가는 고귀한 가문의 배경에서 태어나 어릴 때 미술을 시작했으나 생각이 바뀌어 엉뚱하게 보병연대 소속의 군대생활을 하면서 승마 조교로서 10여년을 보내다 , 다시 마음을 잡아 미술에 투신해서 자기 화풍을 창출한 작가이며 프랑스 인상파 작풍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바 있다.
이런 특별한 인생 여정을 통해 여과된 그의 작품 주제는 일관되리만큼 철저히 종교적인 것이 되어 성서에 나타나는 많은 사건들을 작품 주제로 설정했다.
그는 이런 주제들을 사실적인 방법으로 표현해서 다른 작가들에게서 발견하기 힘든 지상 예수님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즉 일상의 평범한 삶의 모습을 어떤 철학적이거나 이상적 전달이 아닌 철저히 객관적 사실 묘사의 차원에서 제작했으며, 이것은 그전 시대까지 유행했던 낭만주의와 전혀 다른 방법이다.
이런 사실주의와 함께 인상파적인 방법을 병행했는데, 이것을 통해 사실을 명확히 제시하는 면이 더 강하도록 했다.
부드러운 햇살이 비쳐드는 실내.
해질녘에 가까운 오후의 한때. 때는 작가가 태어난 19세기 말,
장소는 시골 교회 부속학교의 교실로 보이는 곳이다.
단순한 벽돌로 된 바닥과 아무런 장식이 없는 벽, 그리고 구석에는 난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추운지방임이 분명한 배경설정이다.
교실의 중앙에는 조금은 야위고 기다란 옷을 걸치신 예수님께서 맨발인채 앉아 계시는데 그의 모습에는 다른 성화에서 볼 수 있는 후광도 어떤 천상적 위엄도 없이 너무도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시다.
주변의 분위기에 조금도 어색하지 않는 너무도 평범한 모습으로 계신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외적 상징도 없다.
그분 주위에는 부모와 함께 온 열 명 정도의 어린이들이 예수님을 순박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어린이들을 교리로 배워서가 아니라 너무도 친근한 인간 예수님의 모습에 매료되어 그분에게 매달리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기적을 행하시고 멋진 강론을 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죄 외에는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바로 알아본 것이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어려울 때 돌보시 고 위로해주는 것이 당신 삶의 전부이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증거하고 계시는 모습으로 계신다
너무도 자상한 모습의 예수님께 끌린 작은 여자 아이는 예수님의 온화한 눈길을 받고, 작은 두려움과 큰 기쁨, 작은 망설임과 큰 즐거움이 교차된 모습으로 주님을 지키고 있다.
한편, 조금 거리를 두고서 둘러싸고 있는 부모들은 어린이와 다른 예수를 향한 경외의 시선을 던지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들었기에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분을 알아본 제자들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
한 어머니가 다른 친구들이 예수님의 품에 안기려는 것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하려는 딸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했듯이 제지하고 있다
작가는 여기서 오늘도 복음을 가르친다는 교회 안에서 ,주님 제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한다는 기성세대의 신자들안에 퍼져있는 허점을 제시하고 있다.
교회는 유능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집단과 같은 인상을 풍기면서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들을 구호의 대상은 될 수 있을 지언정 주님 가까이 있기에는 부당한 존재로 인정하게 된다.
그러기에 교회에서 얼굴을 내밀고 대표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유능한 사람의 모델로 될 수 있는 사림이 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무지와 편견을 책망하시며 그 아이들을 온화하게 당신 곁으로 부르고 계신다.
성서에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무라는 장면이 그리 많지 않으며 특히 제자들에 대해선 그들의 실수까지도 인내롭게 참으셨는데, 여기서는 제자들을 나무라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리기 위한 중대한 결단의 표현이 된다.
너무도 평범한 사람들, 복장이나 표정으로 보아 서민 수준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서 있는 제일 끝에 작은 계집애 하나가 누구의 도움이나 관심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혼자 예수님을 향해 아장걸음을 하고 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자신의 어떤 능력이나 주위 힘 있는 사람에 대한 기대도 없이 그냥 주님을 향해 서툰 발걸음을 띄고 있는 이 어린이는 여러 약점과 허약함 속에서도 실망함이 없이 주님을 찾아 순례의 여정을 살아가는 크리스챤의 모습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한 점의 군덕지나 과장도 없이 성서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른 성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초자연적인 것이나 신비적인 것을 부정하고 철저히 사실에 바탕을 둔 자연 그대로의 가공되지 않는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후광이나 다른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교에서 전래된 상징물도 없이 ,외경이나 교회 전승에 나타나고 있는 어떤 요소도 배제하면서 관객들에게 성서에 바탕을 둔 자연그대로의 가공되지 않는 현실을 보게 만들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조용한 곳에서 복음을 읽을 때의 감동을 느끼게 만들기에 ,하느님의 말씀만을 신앙의 근본으로 여기는 개신교도들도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주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다 보니 등한시 했던 지상 예수님의 모습을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성서의 내용을 너무도 정확하고 담백하게 표현하면서 복음의 다음 내용을 조용하면서도 힘 있게 전하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 요한 4: 17)
너무 기름지고 내용이 풍부한 성화에 익숙한 가톨릭 신자들에는 이 성화가 무슨 젊은 미술 학도의 습작처럼 경박하게 보일 수 있는데, 작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작가가 등장할 당시 한때 작가의 작품은 주제가 너무 품위 없고 표현이 유치하고 천박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는 어린이들을 위한 작품에서 오늘도 세상에서 많이 그려지고 있는 다른 작품처럼 어린이를 인형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크리스챤들이 실현해야 할 중요한 가치 하느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신회하면서 그분께 의탁하며 살아가는 삶임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크리스챤들의 이상적인 삶은 바로 이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어린이로 돌아가는 것임을 조용하면서도 힘있게 제시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 있었어요.
"네 독설보다 네 사랑이 나를 더 아프게 한다."라는...
그 글이 어찌나 고맙고 또 감사한지...
사순의 은총 가득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