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수의 거룩한 변모 (1520)
작가 라페엘로 산치오 (Raphaelo Sanzio : 1485- 1520)
크기 : 페널화: 405X 278cm
소재지 : 바티칸 피나코테카
루카복음 9: 28- 32: 34- 36
이 작품은 작가의 생애 마지막에 속하는 작품으로 당시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의 친척이며 후에 글레멘스 7세가 된 율리오(Giuglio) 추기경이 나르본(Narbonne) 대성당을 위한 작품으로 제작 의뢰한 것이다.
당시 그의 건강은 매우 좋지 않았으나 제자들의 도움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고 대가의 말기 작품다운 성숙의 경지를 보이고 있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한 사건이었기에 참 하느님이시오 참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이해에 아주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림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지고 있는데, 위는 성부의 영광 속에 모습을 변모시킨 주님 주위에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하고 있다.
아래는 악령에 사로잡힌 소년을 낫게 하는 기적이야기인데 서로 연관이 없는 이 두 사건을 하느님의 영광이 거하는 천상과 인간적 고뇌의 현장인 지상의 모습을 너무도 잘 조화시켰다.
그 중간엔 주님을 따라 타볼산에 올라 왔다가 그분의 변모를 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있다.
그들의 일부는 주님의 변모 앞에 혼절상태이고 일부는 이 큰 충격 앞에 기도하는 모습이다.
그들은 주님 가까이 있으면서 주님을 사랑했으나 그분의 인간적 면모만 보다가 변모된 하느님의 아들다운 초월의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 엎드린 모습은 하느님의 현존 앞에 선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신학에서 하느님은 너무도 “매혹적이며 두려우신 분” Fascinandum et tremendum"으로 가르치는데 여기에서 바로 그런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는 것은 너무 대단한 일이기에 이성만으로는 받아 들이기 어려운 큰 신앙의 사건임을 알리고 있다
구름이 덥힌 가운데 그리스도께서는 너무도 밝은 빛에 싸인 가운데 눈처럼 흰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너무도 가까이 여겨지는 다정한 모습이면서도 장엄한 모습의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란 당신의 말씀을 바로 변모 안에서 증거하고 있다
그분은 인간의 모습이지만 전혀 무게가 없는 모습으로 공중을 헌거럽게 날고 계시는데, 이것은 그분은 공간과 시간의 모든 제약에서 해방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고 있다.
한마디로 지상의 모든 장애와 제약에서 해방된 초월적인 존재임을 보이고 있다.
주님의 한껏 펼쳐진 양팔은 얼마 후 겪게 되실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루카 복음 사가는 의도적으로 변모의 사건 전에 주님께서 당신의 수난에 대한 첫 번 예고를 하시고, ( 9: 22- 27) 제자들을 데리고 타볼산으로 가셔서 변모를 보여주신 후 다시 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신 것으로 인도하고 있다.(9: 44- 45)
작가는 이 부분에서 루카 복음 사가의 의도를 집약적으로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팔을 벌린 채 비참하게 죽으신 그분은 어떤 면에서 인간적으로 실패한 모습이나 부활로서 이 실패의 그림자를 내딛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셨듯이 여기 역시 십자가를 암시하면서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빛과 생명에 싸인 분으로서 그분을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이 변모 사건 안에 이미 그리스도 부활 이 암시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팔을 벌리신 주님의 모습은 십자가에서 연상되는 경직됨이 없이 더없이 우아하고 유연한 모습이시다.
주님의 변모 모습을 보고 황홀한 제자들을 초막 셋을 지어 그기에 머물고 싶다고 했으나 주님은 그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 오신다.
이것은 크리스챤의 신체험은 비현실적인 황홀경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라 각박하고 어려운 삶의 현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는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확인하려는 듯 ,루카 복음 9: 37- 45:에 "악령에게 사로잡힌 아이" 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 작가는 예수의 거룩한 변모 사건과 무관한 이 사건을 한 폭에 담으면서 무리없이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잘 조화시키고 있다.
변모 사건 후 산에서 내려온 예수님과 제자들은 심한 간질로 발작을 일으키는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 증상이 너무 심한 발작을 일으키기에 아버지는 말할 수 없는 고통속에서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주님은 병에 시달리는 소년과 그 아버지의 고통을 연민의 마음으로 대하시면서 소년을 치유해 주시자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내용이다.
작가는 이 소년의 병력이 매우 심각한 상태임을 소년의 눈빛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왼손을 땅을 향한 채 하늘을 향한 소년의 눈빛은 실성한 절망적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절망 상태에서도 소년을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힘차게 뻗으며 하느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 소년의 몸짓은 주님의 도움을 요청하고자 하는 제자들의 몸짓과 같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소년의 몸매를 추한 모습이 아닌 아름답게 표현함으로서 소년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게 아니라 악령에 사로잡혀 있기에 악령만 추방하면 정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보여주고 있다.
악령에 들려 정신없이 날뛰는 소년을 보면서 제자들은 연민의 정을 느끼며 당황해 한다.
너무 안타까워 곧 고쳐주고 싶지만 자기들의 믿음이 약함을 알기에 자신이 생기지 않아 난처하고 당황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경황없는 와중에 제자들은 타볼산에서 자신을 변모시킨 주님을 기억하면서 그분께 도움을 청하고자 한다.
절망 속에서 난감한 가운데 , 주님의 변모를 목격한 세 사도 중 두 명이 하늘을 가르키면서 주님께서는 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희망을 주실 수 있으니 그분께 요청하자는 신앙에의 초대를 하게 된다.
인간적으로 더 없이 안타깝고 비참한 가운데서 제자들은 당황하지 말고 주님께 주님안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작품의 중간에 모세와 엘리아 사이에 변모하신 예수님을 두고 제자들은 혼절상태에 빠져 있는 모습을 두 사람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이들은 성서에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다.
추측하면 이 작품의 봉헌자이거나 아니면 이 작품을 모실 계획이었던 나르본 대성당에 연루된 어떤 인물이다
중세 때 성화를 교회에 봉헌하면서 십자가 아래나 적당한 자리에 봉헌자를 그리는 관습이 있었다.
이것은 자기 봉헌에 대한 과시적 차원만이 아니라 주님의 종이며 죄인으로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청하고픈 신앙의 염원에서 작품 속에 자신을 남기게 되었으며
이 작품 역시 이런 연관된 사람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순간에 동참함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고 주님의 은총을 간구하고픈 극히 신앙의 동기로 볼 수 있다.
작가는 불과 37세 라는 짧은 인생을 자신의 천재성을 이해하는 많은 사람들 틈에서 너무 행복하게 살았다.
이 작품은 작가의 생애 마지막 작품답게 작가의 천재성이 무리 없이 표현된 작품이다.
신앙의 내용을 다루면서도 인간 신체의 아름다움을 한껏 표현하기 위해 당시 르네상스 작가로서 쌍벽을 이루던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영향까지 수용했다.
그는 이 작품을 마무리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작가의 장례식 때 이 작품이 놓여 있었다.
너무도 아름답고 생명감 넘치는 이 작품은 작가의 죽은 몸과 대조를 이루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 슬프게 했다.
그러나 작가 역시 작품속의 한 인물로 다시 태어나면서 크리스챤 신앙의 핵심인 주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동참한 새로운 생명의 기쁨을 선사했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작가의 걸작임과 동시 르네상스 예술의 걸작이 되었다.
십자가의길 기도 밖에 생각나지 않았어요...
그렇게하면 되는걸까 생각해보았지요.
지난 금요일 미사 때 거룩한 미사를 어떻게 해야 잘 봉헌할 수 있을까
미사전 기도하는 중에 떠올렸는데 신부님의 미사경본 내용을 속으로
따라 읊으며 하라는 강론중 말씀을 듣고 참으로 놀랐더랬지요...^^
그 때 생각하며 감사히 읽고 옮겨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