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수산나의 목욕 (1555년)
작가 : 틴토레토 (Tintoretto Jacopo Robusti : 1518- 1594)
크기 :켄버스 유채 : 54 X 117cm
소재지 : 오스트리아 비엔나 역사 박물관
인간성의 재발견이란 명목으로 시작된 르네상스 운동은 조각 회화와 같은 분야 뿐 아니라 성미술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전까지 육체는 플라톤 철학의 영향으로 죄와 악의 상징이며 영혼의 감옥이기에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기에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피해야 하고 멀리해야 할 것으로 여겨왔다.
교회 가르침에서도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 정도로 생각해서 영혼의 성스러움을 더 강조하다 보니 , 자연스럽게 육체의 표현은 한껏 절제하면서 성인들에 대한 것이면 후광이나 다른 성스러운 상징까지 동원해가며 육체의 가치나 아름다움 보다 영혼의 고귀성을 강조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그리스 문화에서 영글어진 아름다운 인간 육체가 극단으로 미화되면서 성미술에 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나체는 인간의 호기심의 원초적 갈망이나 위와 같은 정서로 성화에서 표현되는 것은 극히 한정된 부분에서만 가능했었다.
,수산나에 대한 일화는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주제 중 가장 부담없이 나체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기에 여러 작기들이 여기에 대한 작품을 남겨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작가는 인체묘사를 중요시하던 피렌체 화풍과 아름다운 색체 묘사를 중요시한 베네치아 화풍을 접목시켜 총독 관저를 위시해서 베네치아 전체에 많은 걸작을 남겼는데. 이 작품 역시 작가의 르네상스 경향을 잘 확인할 수 있는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구약 다니엘 예언서 13장에 나타나고 있는 긴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바빌론에 요아킴이라는 의인이 있었는데, 그는 고귀한 인품으로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처지였으며 그의 아내 수산나 역시 대단한 미모에다 신앙심 역시 대단히 돈독한 여인이었다.
아쉬운 것 없는 처지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수산나에게 어느 때 부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남편의 일을 돕기 위해 두 명의 나이 지긋한 재판관이 집으로 들어오면서 이들이 수산나의 미모에 음욕을 품기 시작한것이다.
전혀 이런 눈치를 채지 못한 채 수산나가 어느 날 목욕을 하는 순간에 두 늙은이가 나타나서 자기들의 욕심을 들어주지 않으면 수산나가 자기들을 유혹했다는 소문을 퍼트리겠다고 협박했다.
너무도 황당한 것이나 빠져 나올 수 없는 음모의 올가미에 걸렸음을 확인한 수산나는 하느님께 간절히 매달리면서 이 음모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하느님은 다니엘의 재치있는 질문을 통해 늙은이들의 음모를 밝혀냄으로서 수산나가 구원되었다는 통쾌한 내용이다.
하느님께 매달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어려움에서도 구원될 수 있다는 희망의 소식이다.
아무리 르네상스 시대라고 해도 성미술에서 나체를 드러낸다는 것은 좀 힘든 일이었는데, 여기에 가장 적합한 주제가 바로 수산나의 목욕이었다.
성서적인 사실을 표현하는 데는 나체가 줄 수 있는 전통적인 부담도 들수가 있었다.
작가는 르네상스 작가답게 수산나에게서 신앙적인 부분 보다 그의 육체적 아름다움과 인간적 여유로움을 더 강조함으로서 신앙의 대상과 함께 흥미의 대상으로 이 작품에 사람들이 접근하게 만들었다.
햇빛을 받은 수산나의 나신은 더 없이 희고 아름답다.
이것을 통해 작가는 당시대 사람들에게 큰 흥밋거리로 등장하던 인간 육체의 아름다운 표현 안에 신앙의 의미를 담았다
수산나의 아름다운 외모는 육체적인 아름다움 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인도를 받는 인간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만든다,
즉 이 작품 앞에 선 관객들이 당시 시내 어디서나 널부러져 있는 그리스적인 육체의 아름다움이 주는 상상에 함몰하기 보다 ,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며 살아가는 인간의 아름다움이 더 진정한 아름다움임에 눈뜨게 만들었다.
세상과 육체의 아름다움을 통해 하느님안에서 정화된 더 고귀한 아름다움으로 인도하고 있다.
벗은 수산나 앞에는 자신의 용모를 다듬기 위한 큰 거울이 있다.
이것은 당시 모든 유럽을 통털어 성미술 주제의 작품에 유일하게 등장한는 거울이다.
당시 거울은 여성들의 삶에 있어서 사치의 상징이었으나 작가는 사치의 상징만이 아닌 다른 영적인 의미를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3세기를 살았던 성녀 글라라는 수녀들을 위한 회칙에서 "거울"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수녀들이 하느님의 말씀과 회칙이라는 거울에 자주 자신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다듬어라는 영적인 권고였는데 , 작가 역시 이 거울이 단순한 수산나는 외모가 출충한 귀부인만이 아니라 영혼 관리에 신경을 쓰는 신앙인임을 강조하고 있다
두 늙은이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목욕중인 수산나의 벗은 몸을 노려보고 있다.
그들 안에 불타고 있는 욕정을 표현하듯 늙은이 답지 않게 붉은 옷을 입고 있다.
이들의 눈빛은 시편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는 선량한 영혼을 낚아채고 지옥에 빠트리려는 상징으로 등장하는 악인들의 눈빛과 같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굴속의 사자처럼 으늑한 데서 노려보며 가엾은 이 움키려 노리다가는 가엾은 이를 낚꾸어서 그물로 채치나이다."(시편 9: 11)
또한 이 음흉한 노인은 선량한 사람들의 주위엔 언제나 이들을 해치기 위해 준비된 악의 함정이 있으니 항상 깨어 살아야 한다는 다음 성서 구절을 연상시킨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악마를 대적하십시오 "( 1 베드로 5: 8- 9)
성미술 작가들은 그 주인공의 성격에 걸맞는 도구들을 상징으로 도입해서 그들의 삶을 통해 드러난 장한 행적을 표현했다.
가령 순교자라면 톱이나 다른 형구들 ,혹은 동정녀 라면 백합이나 장미 같은 꽃들로 그들의 신분을 암시하고 있는데, 작가는 수산나의 발치에 놓은 여성 장신구를 통해 그녀의 여유로운 처지를 암시하고 있다.
앞에 놓인 거울 , 머리를 손질하는 빗, 진주 목걸리 , 고급 화장품 용기 , 화려한 팔지는 수산나의 처지가 뭇 여성의 부러움을 사기에 족한 처지임을 알리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 목적으로 볼 수 있다.
르네상스적인 우아함과 화려함에 맛들인 사람들에게 적합한 눈요기꺼리로 볼 수 있다.
당시의 많은 작품들이 너무 기름지고 화려했기에 담백한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어렵단 생각에 이런 화려한 도구를 등장시켰다
그러나 이것을 영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수산나는 하느님 앞에 자신을 다듬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여인이라는 것의 강조이다.
즉 영성생활을 영혼의 화장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모든 것의 표현이 자유로워진 현대에서 육체의 표현은 너무 지나쳐서 당황하기도 하고 염려도 하게되는 것이 현대이다.
양파 껍질을 벗기듯 육체의 모든 것을 너무 드러냄으로 육체의 신비감 마저 상실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 작품은 지천에 널부러져 있는 육체적인 표현을 신앙의 시각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좋은 교육 도구로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싶은데 도무지 잘 되질 않아요.
분심만 가득한채 돌아올 때가 매일 반복되어 조금 힘들어하지요.
그런데요...성경이 요즘 저희들이 사용하는거와 다른가봐요.
요즘 사용하는 성경으로 찾아봤는데 시편 10,9 내용이 비슷해요.
감사히 읽고 옮겨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