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평화를 빕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어제 복음과 이어지는 단락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세대를 한탄하시는 말씀입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에서 서로의 호흡과 반응이 중요함을 뜻하는 속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장터에 앉은 아이들이 서로 부르며 말하는 내용은 이 속담을 떠 올리게 만듭니다. 상대편이 피리를 불어 즐겁게 만들어 주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하는 슬픈 상황에서도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상대방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반응을 보이지도 않습니다. 상대나 주변을 돌아보기보다는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다른 이에게 무감각합니다.
그렇게 상대방과 주변을 볼 줄 모르는 이들은 자기 기준, 자기 잣대로만 판단을 합니다.
요한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을 때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는 것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이는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유익하도록 가르치시고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렇게 그분의 계명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평화가 강물처럼,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리고 후손도 모래알처럼 번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안타까움을 밝히십니다.
아무리 하느님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셔도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길로 들어서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바로 깨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좋은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하느님께는 마음을 두지 않았으니 그분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그 길로 들어서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지금 우리는 대림 2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림시기는 여러 가지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참회와 회개, 속죄의 시간이라는 의미도 있고, 구세주 오심을 기쁨과 희망 속에서 기다리는 시기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학적 의미에서 꼭 빠지지 않는 낱말이 있습니다. 바로 “깨어 기다리는”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에 대한 진정한 기다림과 탄생의 기쁨을 더 온전하게 누리기 위해서 깨어 기다리며,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백하고 잘못을 반성하는 시기입니다. 특히나 대림 2주간은 회개를 더욱 촉구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약속된 시간이 되기를 무심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깨어 기다린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이번 주 식당독서에서는 페루지아 전기 중 ‘루카 출신의 한 젊은이의 입회를 거절하다.’라는 부분을 읽었습니다.
입회를 희망하여 성인을 뵈러 온 루카의 한 귀족 아들이 울며불며 받아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그 형제의 육적인 눈물을 알아보고 입회를 거절합니다. 사부님께서 말을 마치자, 그 귀족은 부모가 가져온 말을 타고 바로 세속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전기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놀라면서 성인 안에 계시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다.”
단순히 보면 귀족의 눈물을 꿰뚫어 본 사부님의 능력에 놀라거나, 대단한 독심술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있던 이들은 그러한 사부님의 행동에서 그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보고 영광을 드렸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일상 하나에서도 하느님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깨어있음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나와 상대방, 곧 나를 둘러싼 모든 현상과 사물도 무심히 지나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해야 오늘 복음에서 장터의 아이들이나, 이사야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우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미사 중 본기도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 백성이 다시 오실 외아드님을 깨어 기다리오니, 구세주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저희가 등불을 밝혀 들고 깨어 있다가 그분을 맞이하게 하소서.”
형제님들 모두 절반 정도의 시간이 지난 대림 시기를 다시 돌아보고, 남은 시간을 잘 준비하여 예수님 탄생의 기쁨을 더 즐겁고 기쁘게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