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여라. 반항하는 도성, 더렵혀진 도성, 억압을 일삼는 도성.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오시기를 기다리는 시기가
바로 대림절이라고 우리는 얘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이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오시는데
그 길이 멀어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 길이 험해서 더디 오시는 거라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오시는데 시간이 걸린다면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가 멀거나 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더디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과 우리 사이가 먼 것이 아니라
나의 귀와 마음 사이, 나의 귀와 손 사이가 멉니다.
어제는 저희 성북동 공동체도 이동이 완료되어
새로이 공동체를 이룬 형제들이 만남을 기뻐하며 얘기를 나눴는데
얘기하다가 하느님께서 나보다도 더 나에게 가까이 계신다는 말이
누가 한 말인지를 놓고 설왕설래하였습니다.
어떤 형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라고 하고,
프란치스칸이기를 바란 어떤 형제는 성 보나벤투라의 말이라 하고.
“Deus intimior intimo meo.”
“하느님께서는 나 자신보다도 더 나에게 가까이 계신다.”
이 말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이 맞고 성 보나벤투라도 인용했겠지요.
아무튼 하느님은 진정 나보다도 더 나에게 가까이 계시고,
나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당연히 그분의 말씀도 늘 우리 귓전에 와 있는데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귓전에만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귀에 담아 들어야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되고,
우리의 마음에 담아야 말씀이 우리의 양식이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백성의 원로와 수석사제를 세리나 창녀와 비교하십니다.
맏아들은 아버지 말씀의 맏아들이고
세리와 창녀는 아버지 말씀의 둘째 아들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대답은 시원시원 잘합니다.
그러나 실천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씀의 맏이기는 한데 실천의 맏이는 아닙니다.
건성으로 듣고 건성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열성까지는 없더라도 아버지의 말씀이 마음에는 걸려야 하는데
아버지의 말씀이 마음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망가진 체처럼 아무 것도 거르지 못합니다.
아니, 아예 밑 빠진 독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느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는 주님 말씀의 맏이들입니까?
하느님은 주인님이신데 우리는 종이 아닌 것이 아닙니까?
하느님 존재를 믿지마는 실천적으로 무신론자인 것은 아닐까요?
“말씀은 네 바로 곁에 있고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는
로마서 말씀처럼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귀만이 아니라
진정 우리와 입술과 마음과 손과 발에도 있기를 기도하는 대림절입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마음을 나누지 않으면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 사이의 관계의 질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심리적 공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별을 딸 수 없는 것 처럼
하느님께서 하늘에만 계시다면 어떻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처지를 먼저 헤아리시고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우리 곁에 오셔야 겠다는 마음을 먹으신 것 아닐까! ....아마도......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하느님은 진정 나보다도 더 나에게 가까이 계시고,
나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득 이런 아련한 추억이 떠오름니다.
아주 어렸을 적에 담임선생님께 생각지도 않은 칭찬을 받으면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어머니의 기뻐하는 모습이 먼저 떠올라 엎어질 새라 집으로 달려가던 그 마음.....
부모의 원형이 하느님이시라고 하는 것처럼...
그런 어머니, 하느님의 사랑이 절절히 다가오는 아침입니다.
제가 넘 인간적인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