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어제까지 들은 창세기 1장은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사람도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 명령대로 생겨난 것이 생명입니다.
하느님 명령命令대로 생겨났다고 해서 한자로 生命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 명령에 순명하면 살고 불순명하면 죽습니다.
오늘 들은 창세기 2장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를 하시는데
사람만은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손수 흙을 빚어 만드십니다.
그리고 특별하게도 당신의 숨을 사람의 코에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러니 말씀 한 마디로 우리를 창조하시는 초월적인 하느님보다
우리 인간을 사랑으로 만드시는 다정다감하고 내재적인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숨을 우리가 들이킬 때 우리는 살게 되는데
하느님의 숨이 우리 목을 들락날락한다 해서 우리말로 목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숨을 쉬어야만 살고 숨이 끊어지면 죽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살고자 한다면 숨을 쉬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숨을 쉬면서 매연을 들이키면 죽습니다.
반대로 좋은 공기를 들이키면 암 환자도 낫습니다.
공기空氣에는 기氣가 있는데
매연과 같은 나쁜 공기는 살기殺氣이고
숲속의 좋은 공기는 생기生氣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숲속의 좋은 공기가 생기일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건강을 유지하게 하는 정도이지 우리의 목숨,
그것도 영혼과 육신 모두의 목숨을 살리는 정도는 아닙니다.
하느님의 숨, 곧 성령을 숨 쉬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창세기가 바로 성령을 숨 쉬어야 함을 얘기하고,
요한복음도 우리가 성령의 숨을 쉬어야 함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빌어주시고 파견하시면서 숨을 불어넣어주시며 말씀하시지요.
“성령을 받아라.”
아오스딩 성인은 기도에 대한 정의를 두 가지로 내리고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제일 많이 알고 있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바로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화이면서 성령을 호흡하는 거라는 얘긴데
하느님과의 대화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
바꿔 말하면 말씀이신 성자를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이라면
성령을 호흡하는 것은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이지요.
기도란 생명의 말씀과 생명의 성령을 모시는 거라는 얘깁니다.
그렇습니다.
창조 때 하느님께서 숨을 불어넣어주실 때 아담이 숨을 쉬고,
부활의 주님께서 숨을 불어넣어주실 때 제자들이 숨 쉬었듯이
우리도 하느님께서 오늘 성령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실 때
그 숨, 성령을 들이키는 숨을 쉬도록 합시다.
그것도 아주 깊은 숨을 쉬도록 합시다.
가쁜 숨은 죽어가는 사람이나 쉬고,
씩씩대는 숨은 성난 사람이나 쉬며,
헐떡이는 숨은 힘이 부치는 사람이나 쉬는 것이지요.
좋은 공기는 깊이 그리고 오래 들이켜야 하고,
나쁜 공기는 얕게 들이켰다 빨리 완전히 내뱉어야 하듯
오늘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성령을 들이키는 들숨은 깊이 쉬고
날숨은 악령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도록 빨리 그리고 완전히 내쉬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