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오늘 말씀을 놓고 볼 때 율법과 예언서가 주님께는
폐지의 대상이 아니라 완성의 대상입니다.
율법이나 예언서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불완전하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율법과 예언서의 어떤 면이 불완전한 것입니까?
마태오복음에서 오늘 이 말씀을 하신 다음 이어지는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구약의 불완전함에 대해서 예를 들어 말씀하시는데
살인하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맹세하지 말 것, 보복하지 말 것,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는 미워할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간음을 정당화하는 것과 비교하면
너무도 훌륭한 법이고 분명 사랑에서 비롯된 법입니다.
얼마 전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외신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몇 해 전 인도에서 버스를 탄 여대생을 집단 성폭행하고
죽인 사건이 있었고 이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는데
성 폭행 범인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여대생이 밤늦게 버스를 탄 것이 잘못이고,
폭행 때 저항치 않았으면 죽이지는 않았을 텐데
저항한 것이 오히려 잘못이라고 증언을 한 것이었습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인도정부가 이 다큐멘터리의 상영을 방해하고
이것을 영국 감독이 만들었다고 하여 국제적인 음모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간음하지 말라는 법이 있고 그것이 존중되기만 해도
가히 훌륭하고 충분하다고 우리 중에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정도로 완전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음란한 생각만으로도 간음을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의 완성은 더 엄격한 법을 말하는 겁니까?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완성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렇게 Negative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소극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제 경험을 놓고 볼 때 여자를 안 만난다고
음란한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안 만나면 아무래도 유혹이 적습니다.
그렇다고 음란한 생각을 안 하기 위해 아예 여자를 만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러니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복음적인 사랑을 위하여 여자를 만나야 하고,
그러는 가운데 음란한 생각을 안 할 수 있는 사랑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사랑은 미워하면서 성장하고
죄지으면서 성장한다는 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우리는 종종 죄를 안 짓기 위한 안주,
사랑을 하지 않는 안주를 하기 쉽습니다.
이때의 안주安住는 편안함에 머무는 것이기도 하지만
범죄 안전지대에 머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유혹의 기회를 만들지 않고,
만나지 않는 것이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선 상책이지만
그것으로 사랑의 완성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회개란 이런 안주에서 깨어나고 일어나 사랑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죄 짓지 않는 소극적인 사랑에 안주하려는 우리를
더 완전한 사랑에로 중단 없이 나아가게 하는 회개에의 호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