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대서약미사 강론(2008.1.21)
주님께서 주시는 그 평화가 여기 오신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임(臨)하시기를 빕니다.
우리 3명의 형제들이 오랜 준비 끝에 이제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먼저 이 형제들에게 격려와 축하의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와 복음은 이 세 형제들이 걸어온 여정과 또 앞으로 걸어가야 할 여정을 명료하게 제시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아브람이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들었는데, 주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고 하셨습니다. 여기 있는 세 형제들도 아브람처럼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났고,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작은 형제회로 갔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께로 가기위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떠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오려면 먼저 <떠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비로 대표되는 모든 인간적인 행복과 편안함과 부(富)를 멀리하고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습니다. 우리 수도생활의 선배들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으로부터 이러한 <떠나라!>는 부르심에 순종하여 무작정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항상 이 <떠남>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서약을 발하는 3명의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이 부르심, 즉 <떠나라>는 부르심에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가정과 친구, 친지, 직장 등 그동안 나와 인연을 맺고 있던 모든 것에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어제는 <소유권 포기 예식>을 통해 이제 현재와 미래의 모든 재산과 소유권을 포기함으로써 완전히 세속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떠남은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곳으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 볼 때 아브람의 고향 하란은 기름진 곳이었고 가나안은 말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 사실은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이었습니다. 왜 그곳으로 가라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3 형제들도 <작은형제회>로 왔습니다. 왜 이곳으로 왔는지 부모친지, 친척들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모릅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작은형제회로 가라해서 왔을 뿐입니다.
그 다음으로 제2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바오로 사도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그래서 세 형제들은 이 말씀대로 오늘 자신들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려고 합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형제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종신서약을 통해 형제들은 이제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제물이 되어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고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시듯이, 이제 형제들은 형제들이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제물로 사라졌기에 하느님께서 형제들 안에서 사시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하느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김현석(베드로)가 아닙니다. 더 이상 서석빈(바오로)가 아닙니다. 더 이상 김종화(알로이시오)가 아닙니다. 없어졌습니다. 옛날의 나는 오늘로써 죽었습니다. 이제 새로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수도서약은 제2의 세례가 됩니다. 우리는 세례 때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세속과 마귀와 육신을 끊어버린다는 약속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부정적인 끊어버림의 방법으로 그때 새로 태어났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성대서약을 통해 긍정적인 방법으로 가난과 순종과 정결을 서약함으로써 한 차원 더 높은 신분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 중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하느님의 종>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통해 거듭남의 은혜를 입은 우리 모두이지만 늘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살아오지는 못했습니다. 온갖 죄와 허물로 얼룩지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우리가 약속한 그 끊어버림에 늘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의 은혜는 우리가 약속에 충실한 한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마찬가지로 제2의 세례인 이 성대서약을 통해 여러분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하느님의 종으로 또다시 태어나게 되었지만 이 은혜로운 지위를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약한 순종과 가난과 정결의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유기서약 기간을 거치면서 시험해 보았지만 참으로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이 은총지위를 누리며 살 수 있는지 그 답을 제시하십니다. 아주 간단하고 명쾌합니다. “죽어라!”고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그러니 죽어라! 형제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종의 신분을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여전히 내속에서 꿈틀 거리는 에고(ego) 때문입니다. ego는 ‘참 자아’가 아닙니다. ‘참 나’가 아닙니다. ‘거짓 나’입니다. 이 ‘거짓 나’를 끊임없이 죽이는 과정이 바로 수도생활입니다. 그게 바로 도 닦는 생활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은 모두 죽었습니다. 매일까지 죽어야 합니다. 그 ego를 죽이지 않는 한 ‘참 자아’, ‘참 나’, 곧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종>은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떠나라!>, 그리고 <가거라!> 하셨고, 형제들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라!> 해서 형제들은 오늘 그렇게 바칩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하느님께서는 앞으로도 형제들에게 <죽어라!>고 하십니다. 해도 해도 너무하시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또 그렇게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하면 뭐가 달라집니까? 돈이 나옵니까, 복이 나옵니까???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큰 복을 받을 것이고 또 너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복을 받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브람의 은덕에 그 후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 죽음은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죽음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죽음은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백배, 천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 체험을 하면서 살아가기에 이 삶이 축복된 삶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축복의 길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런 축복입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축복이 아닙니다.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축복이요 보화입니다. 바로 우리는 그 축복에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드려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명하시는대로 길을 잘 걸어왔습니다. <떠나라> 할 때 <예>하고 떠났고, <가라>할 때 <예>하고 갔습니다. <자신을 제물로 바쳐라> 할 때 <예>하고 이렇게 여러분을 바칩니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여러분은 그분의 요청에 기꺼이 <예>하고 응답하리라 믿습니다. 그걸 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10년공부 나무아미타불(?)’입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이제 죽으십시오. 조금 후에 여러분은 그 <죽겠습니다!>는 결심을 상징적으로 땅바닥에 엎드림으로써 보여주게 됩니다. 오늘만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그렇게 죽으십시오. 죽을 때까지 죽으십시오. 그것이 수도생활입니다.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진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죽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많을 열매를 맺고 진짜로 사는 길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을 이끌어 주시고 지켜주신 여러분의 주 하느님께서 앞으로도 이 죽음의 여정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그분의 사람이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함께 이 죽음의 여정을 걷고 있는 수많은 형제들이 있지 않습니까? 형제들에게 부탁하십시오. 내 ego가 꿈틀거리면 항상 지적해주고 죽이는데 도와달라고 하십시오. <고통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누구든지 그 수고의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아멘.>(성 프란치스코)
주님께서 주시는 그 평화가 여기 오신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임(臨)하시기를 빕니다.
우리 3명의 형제들이 오랜 준비 끝에 이제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먼저 이 형제들에게 격려와 축하의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와 복음은 이 세 형제들이 걸어온 여정과 또 앞으로 걸어가야 할 여정을 명료하게 제시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아브람이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들었는데, 주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고 하셨습니다. 여기 있는 세 형제들도 아브람처럼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났고,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작은 형제회로 갔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께로 가기위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떠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오려면 먼저 <떠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비로 대표되는 모든 인간적인 행복과 편안함과 부(富)를 멀리하고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습니다. 우리 수도생활의 선배들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으로부터 이러한 <떠나라!>는 부르심에 순종하여 무작정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항상 이 <떠남>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서약을 발하는 3명의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이 부르심, 즉 <떠나라>는 부르심에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가정과 친구, 친지, 직장 등 그동안 나와 인연을 맺고 있던 모든 것에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어제는 <소유권 포기 예식>을 통해 이제 현재와 미래의 모든 재산과 소유권을 포기함으로써 완전히 세속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떠남은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곳으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 볼 때 아브람의 고향 하란은 기름진 곳이었고 가나안은 말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 사실은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이었습니다. 왜 그곳으로 가라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3 형제들도 <작은형제회>로 왔습니다. 왜 이곳으로 왔는지 부모친지, 친척들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모릅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작은형제회로 가라해서 왔을 뿐입니다.
그 다음으로 제2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바오로 사도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그래서 세 형제들은 이 말씀대로 오늘 자신들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려고 합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형제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종신서약을 통해 형제들은 이제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제물이 되어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고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시듯이, 이제 형제들은 형제들이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제물로 사라졌기에 하느님께서 형제들 안에서 사시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하느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김현석(베드로)가 아닙니다. 더 이상 서석빈(바오로)가 아닙니다. 더 이상 김종화(알로이시오)가 아닙니다. 없어졌습니다. 옛날의 나는 오늘로써 죽었습니다. 이제 새로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수도서약은 제2의 세례가 됩니다. 우리는 세례 때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세속과 마귀와 육신을 끊어버린다는 약속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부정적인 끊어버림의 방법으로 그때 새로 태어났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성대서약을 통해 긍정적인 방법으로 가난과 순종과 정결을 서약함으로써 한 차원 더 높은 신분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 중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하느님의 종>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통해 거듭남의 은혜를 입은 우리 모두이지만 늘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살아오지는 못했습니다. 온갖 죄와 허물로 얼룩지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우리가 약속한 그 끊어버림에 늘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의 은혜는 우리가 약속에 충실한 한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마찬가지로 제2의 세례인 이 성대서약을 통해 여러분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하느님의 종으로 또다시 태어나게 되었지만 이 은혜로운 지위를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약한 순종과 가난과 정결의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유기서약 기간을 거치면서 시험해 보았지만 참으로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이 은총지위를 누리며 살 수 있는지 그 답을 제시하십니다. 아주 간단하고 명쾌합니다. “죽어라!”고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그러니 죽어라! 형제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종의 신분을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여전히 내속에서 꿈틀 거리는 에고(ego) 때문입니다. ego는 ‘참 자아’가 아닙니다. ‘참 나’가 아닙니다. ‘거짓 나’입니다. 이 ‘거짓 나’를 끊임없이 죽이는 과정이 바로 수도생활입니다. 그게 바로 도 닦는 생활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은 모두 죽었습니다. 매일까지 죽어야 합니다. 그 ego를 죽이지 않는 한 ‘참 자아’, ‘참 나’, 곧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종>은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떠나라!>, 그리고 <가거라!> 하셨고, 형제들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라!> 해서 형제들은 오늘 그렇게 바칩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하느님께서는 앞으로도 형제들에게 <죽어라!>고 하십니다. 해도 해도 너무하시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또 그렇게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하면 뭐가 달라집니까? 돈이 나옵니까, 복이 나옵니까???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큰 복을 받을 것이고 또 너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복을 받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브람의 은덕에 그 후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 죽음은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죽음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죽음은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백배, 천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 체험을 하면서 살아가기에 이 삶이 축복된 삶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축복의 길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런 축복입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축복이 아닙니다.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축복이요 보화입니다. 바로 우리는 그 축복에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드려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명하시는대로 길을 잘 걸어왔습니다. <떠나라> 할 때 <예>하고 떠났고, <가라>할 때 <예>하고 갔습니다. <자신을 제물로 바쳐라> 할 때 <예>하고 이렇게 여러분을 바칩니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여러분은 그분의 요청에 기꺼이 <예>하고 응답하리라 믿습니다. 그걸 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10년공부 나무아미타불(?)’입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이제 죽으십시오. 조금 후에 여러분은 그 <죽겠습니다!>는 결심을 상징적으로 땅바닥에 엎드림으로써 보여주게 됩니다. 오늘만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그렇게 죽으십시오. 죽을 때까지 죽으십시오. 그것이 수도생활입니다.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진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죽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많을 열매를 맺고 진짜로 사는 길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을 이끌어 주시고 지켜주신 여러분의 주 하느님께서 앞으로도 이 죽음의 여정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그분의 사람이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함께 이 죽음의 여정을 걷고 있는 수많은 형제들이 있지 않습니까? 형제들에게 부탁하십시오. 내 ego가 꿈틀거리면 항상 지적해주고 죽이는데 도와달라고 하십시오. <고통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누구든지 그 수고의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아멘.>(성 프란치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