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복음들은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금세 믿게 된 것처럼 기록하지만
실제로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시간이 꽤 흐른 뒤일 것이고
그중에서도 토마 사도는 제자들 중에서 제일 나중에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봤듯이 토마 사도야말로 제일 의심을 많이 했기에
처절하게 믿음의 싸움을 하였고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제일 확고하게 믿음을 고백을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 고백은 사실 대단한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인 예수를 하느님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저의 어머니를 하느님으로 만나고,
어머니이신 하느님을 만나려는 의식화 작업을 하는 차원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라고 하거나
‘어머니이신 나의 하느님’이라고 기도하곤 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어머니처럼 인격적으로 가깝게 만나면서도
어머니를 저와의 인간적인 애착관계에서 초월하여 만나기 위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2년이 되어 가는데도
하느님을 어머니처럼 인격적으로 만나는 면에서는 이 기도가 도움이 되지만
어머니를 초월적이고 영적으로 만나는 면에서는 매번 실패를 하고 맙니다.
가여웠던 어머니,
죄송했던 어머니가 여전히 저에게 강하게 남아있고,
그 어머니 앞에서 저는 여전히 불효자와 죄인으로서 어머니를 만납니다.
이런 저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 토마 사도가 비록 저보다 훌륭한 분일지라도
예수님을 하느님과 주님으로 고백하게 된 것은
길고도 처절한 믿음의 싸움을 통한 대단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를 하느님과 주님으로 만남으로서
하느님은 아버지로서 이웃은 형제로서 만나게 됩니다.
우선 성자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됐습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겟세마니의 예수님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성부께 잔을 거두어달라고 하시되 그러나 당신 뜻대로 하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갈라티아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주셨고,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성자를 보내시고,
그리고 그 성자의 영을 또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멀리 초월적으로만 계시고 이름도 부를 수 없던 하느님을
우리도 성자처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서로 형제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다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느님을 부릅니다.
나만의 하느님인 ‘하늘에 계신 저의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한 아버지 안에서 우리는 형제들인데
문제는 정말로 우리가 한 아버지의 형제답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일본에 있고, 여기도 벚꽃이 지금 한창 피었다가 지는 중인데
오늘 이런 묵상을 하면서 옛날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성북동 수도원에서 정동 수도원을 성곽을 따라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벚꽃이 만발하고 너무도 아름다워 저절로 성가 2번,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크게 노래하며 걸어갔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 벚꽃은 일본 놈들의 꽃 아냐?’하는 생각이 들면서
노래는 멈췄고, 속에서는 ‘아냐 원산지는 제주야!’하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기분은 매우 찝찝했고, 속마음은 참으로 쓰라렸습니다.
미물까지도 형제라고 부르는 프란치스코의 제자로 산 지 20년이 넘은 제가
아직도 일본 사람을 형제가 아니라 원수로 만나고 있고,
벚꽃을 내 것, 네 것이라고 하며 따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벚꽃은 일본 것도, 한국 것도 아닌 하느님의 것이지요.
그 하느님의 것을 우리 인간이 내 것, 네 것이라고 소유를 주장하는 겁니다.
이런 저의 잘못을 깨닫고 그 다음 제가 평화 교류 차 일본에 왔을 때
하느님을 우리가 공동의 아버지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형제임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독도, 위안부, 역사 문제로 평화가 있을 수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이번에 일본에 온 것도 나가사키에 국제 평화 공동체 건설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서인데 우리가 이런 정신이 없으면,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초기 공동체의 정신이 없으면
불가능할 거라는 묵상을 이 아침 깊이 묵상합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근 10년이 되는데 얼마전에는 저녁 마침기도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는 대목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이 기도를 바치면서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문득 아~우리 아버지도 하늘에 계시지...!
하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르는 순간, 만나지 못하는 아버지의 절절한 사랑이 가슴으로 밀려오는 것을 느끼면서.....퍼득 떠오르는 것은 제가 지금까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기는 했지만 얼마나 관념적인 신앙이었는가..! 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제 신앙의 현주소에 대해 마음이 아팠답니다.
초월적인 하느님을 만나는, 즉 위로부터의 영성이 우리가 도착해야 할 도착점이긴 하지만
구체적인 현실을 진지하게 접촉하는 실존적인 체험과 부단한 자기 점검없이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달으면서 토마사도는 제가 걸어가야 할 쉽지 않은 아직도 가야할 믿음의 길, 아래로 부터의 영성을 먼저 걸어간 사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2002년 월드컵때 박지성선수가 한골 넣고 히딩크 감독에게 돌진하듯 뛰어가서 안길 때 박지성 선수를 품어안는 히딩크 감독의 모습이 너무 감동적인 나머지 순간 하느님의 모습이 떠 올랐습니다.
저도 이 세상 열심히 살다가 나중에 죽어서 하느님을 만나면 박지성선수가 히딩크 감독에게 안기듯 뛰어가서 따뜻한 하느님 품에 안기려고 합니다.하느님께서 "오, 소화 데레사, 잘 왔다. 그 동안 고생 많았다." 하시며 꼬~옥 안아 주실 것 같아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