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오늘 사도들은 수석사제와 원로들의 위협 앞에서 두 가지를 청합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과
병자의 치유와 같은 하늘의 표징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위협이나 위험에 처할 때 보통 우리 인간이 취하는 두 가지 좋은 태도가
담대함과 신중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위협이나 위험이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할 이유도 없고
담대하게 행동할 이유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협을 받거나 위험에 처했을 때
우리는 어찌 되겠지 하지 않고 신중하게 판단하고,
판단이 선 다음에는 위험에 쫄지 말고 담대하게 행동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판단은 신중하게 하게 되지만
행동은 담대하게 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담대膽大하다는 말이 쓸개가 크다는 뜻이고
한의학적으로도 아마 쓸개가 튼실해야 담대할 수 있는 것인데
나이를 먹을수록 쓸개가 허해지고 약해지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뭣을 할 때 이루게 될 성취와 보람을 생각하기보다는
그 과정에서의 위험, 실패, 어려움 등을 더 많이 생각게 되고,
그래서 참 좋기는 한데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것인지 많이 생각게 되며,
그래서 재고 재다가 결국에는 그만 두는 경우도 많게 되지요.
이런 것이 인간적인 신중함과 담대함의 관계인데
오늘 사도행전의 사도는 이와는 다른 차원의 담대함을 원합니다.
바로 영적인 담대함입니다.
인간적으로 심신이 건강하고 그래서 두려움이 없어서 담대하거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패기와 열망 때문에 담대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성령 충만함으로 담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영적인 담대함이 인간적인 담대함과 다른 것은
이 담대함이 인간적인 목적 때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의 자기 성취를 위해 담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데 담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고,
그래서 오늘 사도들은 그것을 주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기에 사도들은 병의 치유와 같은 하늘의 징표도
아울러 주십사고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이비 종교인이 아니고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기복적으로 치유 은사나 하늘의 징표를 감히 청하지 못하는데
사도들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기에 거리낌 없이 청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처럼 영적인 담대함을 주십사고 청하는 오늘이 되기를 빕니다.
사심이 없으면 마음에 평정심이 생겨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으면서 객관적으로
담대하게 말하고 행동하게 되지만 사심이 있으면 마음부터 평정을 유지할 수 없게 됨을
경험으로도 깨닫게 되지 않나 싶어요. 제 경험으로는요....
그래서 신앙심과 이기심은 결코 같이 갈 수 없다고 하는 말을 귀에 딱지가 들정도로
듣고 있으면서도 어느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 "안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라는 말처럼 이기심을 내려 놓지 않으면서도 영적 성숙을 바라는....그야말로 갖은 묘수를
부리고 용을 쓰고 있는 제 자신을 바라볼 때가 어디 한두번 입니까....!
차라리 제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스스로 고발하고 인정하는 담대함 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이런 말이 기억나네요.
"만약 네가 하느님을 알고 싶으면 먼저 너 자신에 대하여 알도록 해라"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