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예수를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는 곳에 가 닿았다.”
오늘 요한복음은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이 풍랑 중에 주님을 만나는 얘긴데
공관복음의 얘기와 대체적으로 같지만 다른 면도 있습니다.
특히 시작과 끝부분이 다르지요.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자 풍랑이 잔잔해졌음을 얘기하는데 비해
오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셨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고
제자들 스스로 그리고 자기들끼리 떠난 것으로 얘기되고,
예수님을 제자들이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 하지만
예수께서는 배에 오르지 않으시고 어느새 목적지에 가닿은 거로 얘기됩니다.
그렇다면 후대에 쓰인 요한복음이 왜 이렇게 달리 썼을까요?
그냥 그렇게 쓴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의도가 있을까요?
우리가 잘 알다시피 호수를 건너는 제자들의 얘기는 우리의 인생 얘기이고,
우리의 인생이란 호수 이쪽에서 저쪽으로,
곧 차안에서 피안으로 가는 것과 같은데
그 가는 길에 반드시 크나큰 풍랑을 만나기 마련임을 비유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여정을 시작하게 하시는데 비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상관없이 그리고 자기들끼리 여정을 시작합니다.
예수님 없이 자기들끼리만 가도 상관이 없다는 뜻일까요?
제가 사춘기가 되어 인생에 대해 고민할 때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이 고통스러운 삶을 왜 살아야만 할까,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많이 고민했습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내가 아니니
그렇다면 나 아닌 누구에 의해 태어난 것이겠지요.
‘나 아닌 누구’가 하느님이라면 그 하느님이 보여야 하는데 보이지는 않고,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했고,
무엇보다도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다면 힘들게 노를 저어봤자 헛수고이니
노를 열심히 저을 수도 없고 그래도 살아야 하니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어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았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자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때의 저에게는 하느님의 존재 문제가 너무도 절실하였습니다.
왜 내가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 모든 문제가 하느님이 계셔야만 풀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현존을 나타내 보이시기를 그렇게 간절히 원했건만,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자 내가 찾으려고 그렇게 별의별 짓을 다 했건만
하느님은 당신을 나타내 보이시지 않았고 저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방황과 모색의 7년, 절망의 3년,
도합 10년이 지난 뒤에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이제야 나타나셨냐고 화를 내거나
투정을 부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고,
드디어, 마침내 나타나주신 하느님이 너무 반갑고, 고맙기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의 문제도 저절로 풀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올해는 봉헌생활의 해인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 <봉헌생활>은
봉헌생활, 곧 우리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인생이란 <A Patre ad Patrem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께로>의 삶인데
이 ‘하느님께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에서
성자께서는 우리가 따라 가야 할 길이시라고 얘기합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 없이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없이 부부끼리, 또는 가족끼리 어디를 갈 수 있을까요?
수도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없이 수도자들끼리 간다면 어디로 가고, 어떻게 갈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믿고 사랑하는 사람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어느 장소에서든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계시지만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생전에 자신의 고통을 자식에게 투사하면서 화를 낸 적을 한 번도 본 기억이 없고 흔들림 없이 견디는 힘이 강했던....사람이 강하면 따뜻함이나 부드러움이 떨어질 수도 있는데 어머니는 인자함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 이전에 한 인간을 객관적으로 놓고 보더라도.......신기하다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고..
제가 몸이 아파서 곧 죽을 것같이 힘들어 하면 어머니는 "사람이 그렇게 빨리 죽지 않는단다"하고 말씀하시면 아~ 사람이 빨리 죽지 않는구나, 라고 안심을 하게 되고 또 입맛이 없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누워만 있을 때 어머니는 또 "사람이 먹질 않으면 죽는단다"하시면 아~먹지 않으면 죽는 구나, 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곧 저에게 하느님이셨습니다.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사랑은 솜털같이 결이 부드러운 섬세함이기도 하지만 사랑은 명료함을 동시에 지녀야 함도, 인간에 대한 믿음도 어머니를 통해서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던 "착한 것도 열두가지다"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나이가 들고 경험이 확장 되면서 깨닫게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쓰는 까닭은 신부님을 비롯하여 봉헌의 삶을 서원하신 모든 성직자 수도자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예수님께로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이고 목자의 언어적 비언어적인 모습을 통해서, (저는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비언어적인 모습이 언어를 뒤받침하고 더 심금을 울린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알아차리게 하고 느끼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부님을 비롯하여 모든 성직자 수도자들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징검다리입니다. 참 좋은 몫을 택하셨습니다.
자긍심을 가지시고 기쁘고 행복한 봉헌의 삶이 되시길 축원드리며 징검다리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