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하느님의 일을 위해 너희가 할 일은 당신을 믿는 것이라고 어제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오늘 백성들은 뭣으로 믿게 하시겠는지 외려 묻습니다.
주님께서 믿으라고 하시니 백성들은 믿게 하라고 뻗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게 하시라는 백성들의 요청은
믿음이 부족하니 믿음을 더 해 달라고 겸손하게 청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내가 이렇게 믿을 수 없고, 믿고픈 마음이 없는데도
믿을 수 있게 하시겠느냐는, 어쩌면 조롱기가 섞인 뻗댐입니다.
믿지 않으려는 나를 믿게 하는 그런 기적을 보이라고 뻗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아오며 갖게 된 저의 믿음관도 그렇고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그렇고
하느님은 겸손으로 믿는 거지 기적으로 믿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곳곳에서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하십니다.
분명 살리신 것은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능력이 살리시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능력을 청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교만이요,
그래서 교만한 사람에게는 하느님도 아무런 능력을 행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하느님을 무능력자로 만드는 것이고,
무능력자로 만들어놓고 나서는
기적이라도 보여 그 능력을 증명하라는 것이 또한 교만입니다.
허지만 교만한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기적을 보여도 하느님을 못 봅니다.
오늘 복음의 백성도 그 엄청난 빵의 기적을 경험하였으면서도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며 믿게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교만이 깨져야만, 뒤집어 얘기하면 겸손을 지녀야만
하느님의 널려있는 표징들을 보고 하느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만이 깨질까요?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우리의 교만을 깨실까요?
고통을 통해서입니다.
나의 것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다 잃는 고통을 통해서.
내가 일껏 해놓은 것이 다 허사로 돌아가는 고통을 통해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고통을 통해서.
그리고 이런 고통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가난한지 깨달을 때.
내가 얼마나 유한한지 깨달을 때.
내가 얼마나 무력한지 깨달을 때
하느님께 능력을 청하고,
하느님의 능력을 입고,
하느님의 표징들을 보고,
널려있는 표징들을 통해서 마침내 하느님을 보고 믿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의 하느님은 이제 더 이상 능력의 하느님이 아니고
고통을 통해서 드러난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나의 고통에까지 내려오시고 함께 계셔주시는 하느님입니다.
교만의 가죽을 벗는 것은 외부로 부터 어쩔 수 없는 고통이 치고 들어왔을 때가
아니고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제 스스로를 돌아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자신 기도할 때 "나에게 고통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고통을 통해 성숙한다 하더라도 솔직히 그렇게 기도할 용기는 저에게 없습니다.
제 한계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도 은총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그러니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저에게 다가온다면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
차라리 현실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뻔히 안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음인 줄은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진 않으셨다는 것,
다만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