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소주일이며
살리시는 주님,
구원하시는 주님,
소중히 여기시는 부활의 주님을 기념 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혼동합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해야 할 것을 좋아한다고 얘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저를 사랑한다 하지 않고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에 대해서 소름이 끼칩니다.
좋아하는 것은 싫어하는 것만큼 그리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싫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내 입맛에 맞으면 좋고, 안 맞으면 싫은 것이기에
지독히 자기중심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의 입맛에 따라 사람이 평가되어야 하고
내 입맛에 따라 좋은 것이 될 수도,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모든 조물을 보시고 좋더라 하신 것처럼 본래 다 좋은 것인데
어찌 나의 입맛에 따라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까?
좋아하는 것이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제인 또 다른 이유는
남을 소유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좋으니까 소유한 것은 소유했다가도 싫어지면 버리게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오죽 싫증을 잘 냅니까?
싫증이란 싫어하는 증세인데
소중한 존재인 우리 인간이 소유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싫어하면 버림받는 존재가 되기도 하기에 문제인 것입니다.
자체로 소중한 존재가 어떻게 소유와 버림의 대상의 되는 것입니까?
오늘 1독서에서 베드로는 여러분에게 버림을 받은 예수님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고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하느님은 그 분을 살리셨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왜 누구는 죽이고, 왜 누구는 같은 사람을 살립니까?
왜 누구는 쓰레기처럼 버리고, 왜 누구는 같은 사람을 소중히 여깁니까?
왜 누구에게는 예수가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는 분이 되고
왜 누구에게는 이렇게 소중한 분이 길거리의 버림받은 걸림돌이 됩니까?
왜 누구는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고
왜 누구는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발생하지 않습니까?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참 사랑이 아닌 소유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참 사랑은 존재를 자유롭게 합니다.
존재를 그대로 좋다고 하시고 다 좋다고 하십니다.
좋게 여기시지만 소유하지 않으시고 귀부인처럼 소중히 여기십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시기에 버리심은 가당치 않고
착한 목자이시기에 삯꾼처럼 이리에게 우리를 버리고 가시지 않습니다.
양들이 흩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부르시고 모으시며
양들을 샅샅이 다 아시기에 빠트리지 않고 부르십니다.
당신이 참으로 좋다하시며 당신께로 부르시고
당신 계신 곳이 참으로 좋다하시며 그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우리 안에 들어있지 않은 양이 없도록,
버림받은 양이 없도록 당신의 우리 안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이렇게 소중히 여기시니
우리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소중한 하느님의 부르심, 성소를 쓰레기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나만 성소에 충실히 응답할 뿐 아니라
흩어진 다른 양들도 성소에 응답하도록
우리는 또 다른 착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충실한 성소에의 응답이
다른 이도 성소에 충실히 응답 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이 행복한 수도성소가
여러분에게 자극이 되었으면 합니다.
많은 주님의 제자들, 제 2의 그리스도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