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을 베푸는 이들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
그러나 죄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바로 저희 자신에게 원수가 된다.”
토빗기의 마지막 부분은 자선을 베푸는 이와
불의를 저지르는 자를 대조하면서 선을 행하고 불의를 피하라고 합니다.
자선을 행하는 이는 충만한 삶을 누립니다.
충만한 삶이란 돈이 많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충만充滿이란 요즘 젊은 사람들의 표현으로는 완전 만족이고
완전 만족이라면 결핍이 전혀 없는 완전한 행복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충만하다 한들 어떻게 결핍이 전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사는 세상을 보면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가난합니다.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충만한 것입니다.
제가 처음 필리핀 국제회의를 갔을 때입니다.
‘People Power’를 앞세워 마르코스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것을 기념하여
한 달 동안 <정의와 평화>를 주제로 마닐라에서 회의를 하였는데
회의 중에 Exposure 프로그램으로 Smoky Mountain을 간다는 거였습니다.
지금도 영어가 짧지만 그때는 영어가 더 짧아서 저는
긴 회의 중간에 필리핀의 화산 지역으로 바람 쐬러 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마닐라 근교의 <쓰레기 산>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서 간 것이었지요.
그 쓰레기 산이 비와 뜨거운 열기 때문에 늘 김이 올라가기에
Smoky Mountain이라고 부른 것이었는데 제가 둘러볼 때
마침 가난한 아낙이 발가벗은 아이를 안고서 쓰레기 더미를 뒤지다가
거기에 떨어진 과일을 주워서 아이를 먹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제 옆에 있던 유럽에서 온 신부가 ‘우리나라에는
개를 위한 상점도 있는데’ 하며 혼자 소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아낙의 얼굴과 유럽신부의 말을 놓고 비교하게 되었지요.
당시 유럽에 사회보장 제도가 잘 되어 있고 개를 위한 상점도 있다지만
유럽 사람들이 이곳 필리핀 사람, 아니 이 아낙보다 더 행복할까?
당시 유럽과 필리핀의 자살 율과 행복지수를 놓고 볼 때
유럽 사람들이 결코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없었으며,
표정으로 볼 때 오히려 그 아낙이 더 행복해 보였습니다.
씩 웃는데 쓰레기더미에서 주은 과일 하나로 충분하다는 표정이었지요.
선행은 이처럼 선으로 가득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고.
충만한 선이신 하느님을 닮은 충만한 사람만이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 안에 아무런 선이 없고 악으로 가득한 사람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선행을 할 수 없는 법입니다.
헌데 어떻게 어떤 사람은 선으로 충만하고 어떤 사람은 악으로 가득합니까?
욕심이 없으면 선으로 충만하고 욕심이 가득하면 악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욕심이란 더 소유하려는 마음이고, 당연히 선을 더 소유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욕심이란 끊임없이 ‘-면 좋겠다!’다고 하는 마음입니다.
늘 ‘했으면 좋겠다.’,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지금, 이것으로 충분히 ‘좋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현재를 사는데 지금의 선을 누리지 못하고
선을 늘 미래의 선으로 미뤄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불의에 희생된 다른 사람들에게 원수가 되기 이전에
자기 자신에게 원수가 되는 사람이라고 토빗은 얘기합니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사람이 원수라고 한다면
불의한 사람은 미래의 욕심 때문에 현재의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자기가 자신의 원수가 되는 사람, 곧 스스로 불행해지는 사람이지요.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