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아주 냉정하게 얘기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 됐지
돌아가시기 전에 만찬을 하시며 빵과 포도주를 나눠 주시는
그런 예식을 굳이 하실 필요가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십자가에서 그저 돌아가시면 그것으로 사랑 표현이 충분한데
내 몸을 받아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 하는 게 꼭 쇼 같다는 거지요.
그런데 맞습니다.
주님께서 만찬에서 하신 것이 진짜 쇼입니다.
그러나 쇼는 쇼인데 사랑 쇼입니다.
쇼show란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보여주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거지요.
그런데 사랑 쇼이니 주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사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부터 사랑 쇼이고, 깜짝 쇼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 느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우리의 감각 안으로 깜짝 들어오신 것이 육화입니다.
헌데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감각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 주님의 육화라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우리의 감각 안에서
계속 재현되도록 해주신 것이 성체와 성혈의 성사인 것입니다.
저희 형제들은 가끔 어머니 동영상을 돌려봅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그 동영상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돌아가신 뒤 가족회의에서 어머니를 기억하기 위해
어머니 계시던 방을 어머니 박물관처럼 만들자고 제가 제의했지만
지금도 형 집에 가면 어머니 계시던 방을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아직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깊은 내면의 심리 작용이 있나 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제게 써주신 유언과 같은 편지는 볼 수 있고,
그 편지를 읽을 때 그 편지는 어머니가 내 옆에 살아계신 듯
어머니의 현존과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성체와 성혈의 성사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오시고, 특별히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매일같이 먹는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다시 보고 느끼고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주님 말씀을 읽고 들음으로써 되새깁니다.
성사란 하느님을 보게 하고 느끼게 하는 모든 일과 행위지요.
그런데 밥을 먹을 때 개돼지처럼 먹으면 하느님이 발생하지 않으니
밥 먹는 것이 결코 성사가 되지 못합니다.
포도주를 마실 때 알콜 중독자처럼 마시고 술주정이나 한다면
이 또한 거기에 하느님이 안 계시니 성사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흔하게 행하는 먹고 마시는 행위가
당신의 사랑을 보고 느끼는 성사가 되도록 거룩한 예식을 남기시고
이 예식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재현하고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체와 성혈의 성사는 다른 어떤 성사보다도 기억의 성사이고,
기억의 성사이되 쓰디쓰고 추잡한 그 옛날일의 기억이 아니라
주님의 그 거룩한 희생의 사랑을 기억하는 성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사랑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습니까?
지워버리지는 않지만 잊어버리고 마는 것은 아닙니까?
지워버리는 것은 죄스럽고
잊혀진다는 것은 슬픕니다.
우리는 지워버리지 않을 것이고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이 거룩한 축일을 지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