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성심 대축일의 독서로 교회는 에페소서를 읽습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얘기하면서
두 가지를 우리에게 희망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를,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안에 사시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오늘 성심 대축일에 우리가 이루어야 할 것이 아닐까요?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그러니까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 인간의 지각 능력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각 능력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다른 번역에서는 지식을 뛰어넘는 사랑이라고도 하고
인간의 머리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지식과 감각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바오로 사도는 바로 앞에서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다 알 수 없고 그래서 신비라고 바오로 사도는 얘기하는 겁니다.
저는 사랑과 관련하여 일종의 열등감이랄까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제가 자녀를 가진 사람들보다 사랑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그런 거지요.
제가 보편적인 사랑이나 관념적인 사랑은 더 잘 알고 잘 할지 모르지만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너비와 길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잘 못할 겁니다.
종종 자식이 말썽을 부리거나 부모의 사랑에 대해서 타박을 하면
부모님들이 자주 하는 말씀이 ‘너도 애 나서 키워봐’입니다.
애를 낳기 전에도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알지만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는 애를 낳고 키워봐야 알지요.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이러한데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을 어떠할까요?
우리는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지만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는 정말 다 알지 못하고
살아가면서 그러니까 삶의 경험을 통해서 조금씩 알아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기는 하지만
그 크기가 어떠한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앎과 깨달음의 차이이고
이런 모른다는 깨달음이 있을 때 하느님 사랑의 신비는
겸손한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와 우리 마음 안에 자리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면서 부모의 사랑을 알아가고 배워가듯
하느님의 사랑도 사랑하면서 알게 되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
우리는 주님의 크신 사랑 앞에서 한 편으로는 겸손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사랑하면서 그 큰 사랑에 도전해보리라 마음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