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그 씨가 어떻게 자라서 열매를 맺는지 알지 못하며,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인 겨자씨를 뿌렸을 때, 그 누구도 그 겨자씨가 크게 자랄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겨자씨. 그렇다면 겨자씨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집 밖에서 묵상을 하면서 산책을 하던 중, 무심코 묘지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성거산 공동체에는 돌아가신 형제님들을 모시는 묘지가 있습니다. 형제님들의 묘비를 하나씩 둘러보면서, 이 형제님들이 각각 겨자씨 한 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형제는 수도회 안팎에서 크고 많은 일들을 했고, 또 어떤 형제는 수도회에 입회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하느님 곁으로 떠났습니다. 그 형제님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았는가 보다는, 프란치스칸으로써 한 생을 마치고, 이곳에 누워있다는 것이, 지금 프란치스칸으로써 살고 있는 저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이정표로 다가옵니다. 그 형제님들이 믿고 따라가려고 했던 그 하느님이 정말 존재하신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을 추구하려던 그 길이 정말 복된 길이라는 것. 그것을 믿었기에 죽음에 이르기까지 프란치스칸으로서의 길을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그 형제님들이 살아간 그 삶은 비록 나약한 한 인간의 삶이었겠지만, 그 삶 안에서 조금이나마 하느님이 드러난다면, 그 삶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하느님의 나라는 조금씩 자라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 형제님들이, 자신들의 행동이, 자신들의 삶이 그렇게까지 크게,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을지라도.
이런 의미에서 우리 각자도 겨자씨가 될 수 있고, 겨자씨가 되어야 합니다. 대단히 큰 무엇인가를 해서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돈을 기부해서가 아니라, 겨자씨처럼 작은, 내 일상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사소한 것에서 우리는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한 마디 말 속에서 우리는 작은 겨자씨 한 알을 우리의 마음속에, 상대방의 마음속에 심을 수 있습니다. 한 번 더 양보하고, 한 번 더 인내하는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조금씩 더 커 갈 것입니다.
내가 한 번 웃은 미소가 상대방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작용할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씨 뿌리는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씨가 자라나 수확을 하듯이, 우리의 그 작은 미소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에게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올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그 기쁨을 이 세상에서 이미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 각자 작은 겨자씨가 되어야겠습니다. 겨자씨로 살아가는 것이 한편으로는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처럼 어렵고 힘들겠지만, 시편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우리는 기쁨으로 곡식을, 하느님의 나라에 함께 살아가는 그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