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주님의 오늘 이 말씀은 제게 이렇게 들립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다른 종교 믿는 사람보다 잘하는 게 무엇이냐?
수도생활 한다는 네가 그리 한다면
네가 일반 신자들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
주님은 우리에게 “더”를 살기를 원하십니다.
가지기를 “더” 바라는 것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하지만
사랑을 “더” 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이라는 말씀인데
“더”란 남보다 “더” 사랑하고, 지금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는 것은 남보다 더 가지려고 하고
사랑하는 것은 남보다 더 못한다면 얼마나 수치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그리고 특별히
봉헌생활의 해에 봉헌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도전을 하십니다.
이런 면에서 바오로 사도도 오늘 코린토 신자들게 도전합니다.
먼저 마케도니아 교회들의 훌륭한 행위에 대해 이렇게 칭찬합니다.
“그들은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후한 인심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코린토 신자들도 칭찬을 하며 또한 권고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온갖 열성에서,
또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나므로,
이 은혜로운 일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칭찬의 내용 중에서
믿음과 말과 지식과 열성에서 뛰어나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는 칭찬인데
그 다음 칭찬, 사랑 받는 데서도 뛰어나다는 것은 좀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사랑을 받는 데서도 뛰어나다는 말을 뒤집으면
사랑을 잘 받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삐딱한 사람은 사랑도 삐딱하게 받아들일 것이고.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도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며,
교만한 사람은 사랑을 무시하거나 아무 사랑이나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사랑 받는 데서 뛰어난 것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사랑 받는 데서 뛰어남을 얘기하며
코린토 교회가 이제 사랑하는 데서도 뛰어나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받는 것이나 하는 것이나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유행가를 듣지 않기 때문에 버스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자주 흘러나오는 유행가라야 알게 되는데
그 중에서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노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노래의 내용은 모르지만 제목만은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사랑은 진짜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사랑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넘치는 사랑이라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늘 사랑의 결핍을 느끼며 허덕이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사랑이 넘쳐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결핍을 느낀다면 먼저 받아야 하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역시 결핍을 느끼는 사람에게서 받으려 하는데
그러지 말고 결핍이 도무지 없고 사랑이 넘치시는 하느님께 받아야겠지요.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은 더더욱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와 햇빛을 주시는 하느님 사랑을 받아야지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