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풀려난 자, 풀어주는 자.
오늘 사도행전은 베드로 사도가 사슬에서 풀려나고
감옥에서 풀려나는 얘기를 들려주고 있으며
복음은 풀어주는 소명을 받음에 대해 들려줍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는 풀려난 존재이고 풀어주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유롭게 되고 자유롭게 하는 존재인 겁니다.
세상의 권력인 헤로데는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고 사슬로 묶어두려 하지만
교회의 사람인 베드로는 거기에서 풀려납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어떻게 풀려납니까?
베드로 사도가 풀려나려고 애를 쓴 결과로 풀려났습니까?
다시 말해서 스스로 풀려날 궁리를 하다가 자기 힘으로 벗어난 것입니까?
전혀 그렇기 않지요.
자기보다 먼저 헤로데에게 야고보가 죽임을 당한 것을 봤음에도
베드로는 죽이려는 헤로데의 음모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자기가 제일 먼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야고보가 먼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 때문에
영적인 경쟁심, 순교의 경쟁심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성령을 받기 전의 베드로였다면 모를까 이제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이 세상의 어떤 사슬도 감옥도 속박이나 억압이 될 수 없을 것이고
그래서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마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감옥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풀려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정작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감옥이 아니라 죄와 죄책감이었을 겁니다.
명색이 첫 제자이고 주님께서 당신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자기인데
그리고 자기는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한 자기인데
누구보다 먼저 배반을 하였으니 얼마나 그 죄책감이 컸겠습니까?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 물으시고,
세 번 사랑한다고 다시 사랑을 고백하자 당신 양들을 맡기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죄책감에서 풀려났을 것이고,
성령께서 내려오셨을 때 죄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것입니다.
죄와 죄책감에서 풀려나고 벗어난 베드로가 이제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을 죄의 억압과 죽음으로부터 풀어주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죄의 억압과 죽음으로부터 풀어주는 것이 비단
고백성사를 통한 죄의 용서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죄의 사람이 죄에 대해서 죽고
성령, 곧 사랑의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고백성사가 이미 지은 죄, 곧 과거를 용서를 통해 풀어주는 것이라면
성령으로 거듭남은 새로운 존재로 미래를 새로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때 베드로 사도와 같았던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이제
이 세상의 모든 죄의 억압과 속박으로부터 풀려나야 하고
성령의 사람, 사랑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자유롭게 되었다면 다른 사람도 자유롭게 해줘야 합니다.
내가 용서해야 할 일이 있다면 내가 그를 용서하고,
그가 용서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가 나를 용서하며
그리고 더 이상 세상과 세상 인연에 매이지 않는 새 사람이 되도록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기도한 교회처럼 기도해줘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풀려난 존재이고 풀어주는 존재인 것입니다."
라는 말씀은 문득, 어디선가 읽은 기억을 떠오르게 합니다.
"따귀맞은 사람이 따귀 때린다."
사랑도 받아 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안다는 것과 같은 말로,
본대로 배운데로 한다는 말이 그런 말일 것입니다.
저 부터 다른이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해야겠습니다.
제가 하느님으로 부터 그리고 가까운 사람으로 부터 받은 그 사랑의 체험으로 말입니다.
그리하여 다른이도 또 다른이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다짐하는 이 순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