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호수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오늘 마태오복음은 같은 얘기를 전하는 다른 공관복음과 좀 다릅니다.
다른 공관복음에선 지명이 게라사인데 마태오복음에서는 가다라이고,
다른 공관복음에서는 마귀 또는 악령 들린 사람이 한 사람인데
마태오복음에서는 “마귀 들린 사람 둘”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그리 중요한 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중요한 차이는 예수님과 악령들의 만남입니다.
다른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악령 들린 이가 있는 곳에 들어서시자
악령들이 달려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으로 얘기하는데 비해
마태오복음은 마치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에 없는 말을 악령들이 지껄입니다.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 오셨습니까?”라고
“때가 되기도 전”이라는 것을 마태오복음은 명시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말은 정해진 때나 약속된 때가 있다는 뜻일까요?
여기서의 때란 분명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구원의 때요,
멸망할 사람에게는 멸망의 때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는 종말론적인 구원과 멸망의 때일 겁니다.
그런데 이때는 정해지지 않고 하느님 외에 누구도 모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리 대답하셨지요.
마태오복음 24장은 이때와 관련하여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노아 때의 일을 생각해보아라.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바로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때가 되기 전”이란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악령들은 사람의 아들이 오실 때, 곧 자기들의 멸망의 때를
그리스도께서 종말의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전에 오신 겁니다.
그렇지요. 주님께서는 세상이 모두 멸망하기 전에 구원하러 오셨는데
악령들에게는 구원하러 오신 주님이 멸망시키러 오신 주님이 되고,
구원이 멸망이 되고, 구원의 때가 멸망의 때가 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악령이란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멸망시키러 오신 분으로 생각하는 존재이고,
구원을 멸망으로, 사랑을 괴롭힘 쯤으로 생각하는 존재이며,
그래서 종말의 때, 어쩔 수 없이 모두 멸망해야 할 때가 되기 전엔
주님께서 오지 않기를 바라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악령은 왜 이러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느님 나라보다 이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개똥밭이든 쇠똥 밭이든 이승에서 사는 것이 좋기 때문이고
그래서 주님께서 아무리 하느님 나라가 좋다고 하셔도
악령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싫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는 어떤 존재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 내겐 구원입니까, 멸망입니까?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 사랑입니까, 괴롭힘입니까?
주님께서 지금 오신다면 너무 이릅니까, 제때입니까?
돼지 안에서라도 이 세상이 좋습니까, 하느님 나라가 좋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