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셨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마태오복음도 다른 공관복음과 다른데,
그 다름이 다른 복음에 비해 짧고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마르코복음이 단순하고 마태오나 루카 복음이 뭘 덧붙이는데
오늘 복음은 오히려 마르코복음의 얘기 중 일부를 뺀 것입니다.
그것이 뭔고 하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오는 협조자들의 행위 묘사입니다.
다른 공관복음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오기 위해
지붕을 벗겨내고 병자를 그리로 내려 보내는 수고를 묘사합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은 협조자들의 그 수고에 대한 묘사를 굳이 빼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언급은 그대로 나둡니다.
아무튼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그들의 사랑을 보시고>나 <그들의 수고를 보시고>라고 하지 않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복음은 얘기하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왜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치유해주셨을까?
먼저 사랑이나 수고를 언급치 않고 믿음을 언급한 것에 대해 보면
사랑이나 수고는 협조자들의 병자에 대한 태도와 행위인데 비해
믿음은 주님 또는 하느님께 대한 태도와 행위입니다.
협조자들이 병자를 많이 사랑하여 병자가 요청하는 대로
침상 째 병자를 주님께 데려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것은
인간적인 사랑이지 하느님께 향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시 말해서 그들은 병자의 요청을 들어준 것이지
주님께 믿음을 두고 병자와 함께 주님께 치유를 청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오복음은 그들의 수고와 사랑이 병자를 치유케 한 게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병자를 치유케 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협조자들의 수고 부분을 뺀 것이 아닐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의 공로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인데
우리의 믿음이란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인 것이고,
하느님을 구원자로 믿을 때 하느님께서 구원해주신다는 믿음이지요.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뺀 채 나의 사랑과 나의 수고로
공동체나 사람을 바꾸고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합니다.
치유도 마찬가지여서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청하지 않고
지극정성의 간호와 의사의 치유만으로 낫게 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의문인 협조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치유해주신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개인의 믿음도 보시지만 공동체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우리가 잘 이해하였다면
협조자들만 믿음이 있고 병자는 믿음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 개인을 치유하건
공동체를 치유하건
우리는 공동체로서 주님을 믿고,
공동체로서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있는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런 반성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공동체와 함께 주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 공동체는 함께 주님께 나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