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표현도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늦은 믿음
가능하다면 토마스 사도의 믿음은 늦은 믿음이라고 이름붙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이름도 토마스 사도에게 붙이고 싶습니다.
굳은 믿음
토마스 사도는 또한 굳은 믿음을 갖게 된 분이고
그래서 토마스 사도는 굳은 믿음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늦은 믿음이 굳은 믿음이 되기까지의 시간이 여드레입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뵙고 믿은 것과
토마스 사도가 주님을 뵙고 믿은 것의 시차가 여드레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이 이렇게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러니까 토마스 사도의 믿음은 다른 사도들보다 여드레 늦은 믿음이고,
많은 경우 우리의 믿음도 다른 사람보다 여드레 늦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여드레 늦게 믿었다고
토마스 사도의 여드레는 불신의 여드레라고 또한 말할 수 있을까요?
더 정확히 얘기해서 믿지 않은 여드레일까요, 믿지 못한 여드레일까요?
제 생각에 토마스 사도의 여드레는 아무리 다른 제자들이 믿더라도
나는 믿지 않겠다는 불신의 여드레가 아니라
믿으려 해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여드레였을 것입니다.
복음도 <믿지 않겠소>가 아니라 <믿지 못하겠소>라고 기술하고 있지요.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그러므로 이 여드레는 열등감의 여드레요 답답함의 여드레였을 것이고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보고 싶고, 믿고 싶은
갈망의 여드레, 열망의 여드레였을 것이고,
또한 갈망과 열망이 은총을 만나기까지의 여드레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토마스 사도의 여드레는 진짜 불신의 여드레일 수도 있습니다.
영어 번역을 보면 “I can not believe.”가 아니라
“I will not believe.”라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토마스 사도는 단단히 화가 나 있거나 꼬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화가 나 있고 뭣 때문에 꼬여 있을까요?
아마 주님께 화가 나 있고 허무하게 돌아가신 것 때문에 화가 났으며
그래서 배배 꼬인 마음으로 이제는 그리고 더는 믿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라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믿고 따랐는데,
모든 것을 버리고 믿고 따랐는데
주님께서 이런 믿음에 먼저 배신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는
토마스 사도가 제자단에서 도망쳐 여기저기 방황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토마스 사도가 분노를 가라앉히고
회심을 하여 공동체에 합류했을 때 주님께서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러므로 이 여드레는 불신의 여드레, 분노의 여드레, 방황의 여드레이면서
동시에 회심의 여드레이며 공동체에 합류하기까지의 여드레입니다.
주님께서는 토마스 사도가 혼자 있을 때 나타나셨을 수도 있었지만
굳이 공동체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셨다가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은 시사 하는 바가 대단히 큽니다.
하느님 체험은 사적 체험도 있지만 공동체적 체험이라는 것이지요.
아무튼 지금 내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불신한다면
나는 어떤 불신이고 왜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까?
이것을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