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신 후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의 일부분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파견된 선교사들에게만 해당한다고 말하기 보다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갖고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오늘 복음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며,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오해가 생기기도 쉽고, 그 오해는 자칫 미움으로 번져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돈이 중심이 되는 판단기준과 사랑이 중심이 되는 판단기준 사이에서 자주 벌어지지만, 수도원 안에서 형제들과 함께 살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생겨납니다.
오해와 미움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장애물이지만, 그래서 오해가 생겼을 때, 빨리 벗어나고 싶지만,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지만,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또한 그것들입니다.
미움을 받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견디라고 말씀하십니다. 미움이 고통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상대방을 아예 보지 않고 무시하거나, 싸움을 통해서 상대방을 이겨서 그 미움을 해결하려 합니다. 견디는 것은 무식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무조건 견딘다는 것은 때로 화병 등 수 많은 마음의 병을 가져오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예수님께서는 견디라는 말 밖에 다른 말씀이 없으십니다.
하지만 박해의 상황에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일러 주실 하느님께서는, 또한 미움의 상황을 견디어 갈 힘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되기 위해서 우선 우리의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함에 있어서 사랑이 그 판단 기준이라면,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방법을 택했다면, 만약 그 방법이 상대방이 생각했던 방법과 다를지라도, 그래서 오해가 생겼을지라도, 그 오해로 생겨난 미움을 견딜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나를 무시해도, 그 오해가 미움으로까지 번져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나고,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복음의 말씀은 선교사들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순간, 우리의 판단이 사랑에 의한 판단인지 알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선 견디는 것이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 역시 오해와 미움의 순간에 수도회를 떠나기 보다는, 박해 속에서 수도회에 머물 것을 형제들에게 권고합니다. 그러한 머묾, 그러한 견디어 냄 속에 복됨이 있습니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을 따라가려 할 때, 오해를 통해서 미움에 도달하기 보다는, 자기를 미워하는 형제들에 대한 용서와 연민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하느님 때문에 우리는 이 고통을 견디는 것이고,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겪은 그 고통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우리가 왜 고통을 견디어 내야 하는가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조건 견디는 것은, 무조건 참는 것은 우리에게 병을 가지고 오지만,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견디는 것은,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사랑을 순수하게 만들고, 그렇게 우리는 그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참다운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