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하였다.”
오늘 우리가 들은 창세기의 얘기는 우리가 어렸을 때 많이 들은
도깨비나 허깨비의 얘기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이런 얘기는 여러 문화권에 펼쳐져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전기도 없고, 밤에 다니는 사람도 없을 때
사람들, 보통의 경우 남자들이 술을 한 잔 거나하게 마시고
집으로 오다가 도깨비와 만나 밤새도록 씨름을 하였는데
아침에 깨어나 보니 빗자루를 안고 자고 있다는 식의 얘기지요.
그래서 그런 도깨비를 우리는 허깨비라고도 하는데
이런 얘기를 구약은 야곱의 하느님 체험의 얘기로 바꿉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입니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그 이름이 그에게서 비롯된 그런 존재지요.
이스라엘을 이루는 12지파가 그의 열두 아들에게서 나왔으니
아브라함과 이사악도 이스라엘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야곱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존재지요.
그런데 이런 야곱이 원래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될 만한 사람이었습니까?
한 인간으로서는 결코 그럴만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장자권을 차지하기 위해 사기를 치고 술수를 부린 자입니다.
그것 때문에 형으로부터 복수를 당할까 도망을 친 겁쟁이기도 하고요.
자식들한테는 어떻게 했습니까?
형과 경쟁하여 장자권을 차지한 것으로 부족하여
자식들을 편애하여 자기 자식들도 골육상쟁을 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형편없는 존재가 어떻게 하느님 백성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된 이유가 오늘 창세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감히 하느님과 싸운 사람이 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형과 삼촌, 곧 사람들과 싸운 존재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감히 시도조치 않는 하느님과도 싸운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런 야곱을 높이 산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친히 그에게 이름을 내리십니다.
이스라엘, ‘하느님께서 싸우신다.’의 뜻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도 야곱 못지않게 세속적이고 약점이 많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인간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신일 필요가 없습니다.
신일 필요는 없고 다만 신과 씨름하는 사람이면 됩니다.
그러나 시늉하다 마는 씨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졌다고 하실 때까지 밤새도록 끈질기게 싸워야 합니다.
또 하나 우리가 야곱에게 배울 것이 있습니다.
야곱은 야뽁강을 건너기 전, 그러니까 형 에사우를 만나기 전,
먼저 하느님과 씨름을 하였습니다.
형 에사우를 만나는 것은 매우 두려운 것이었고,
그래서 야곱은 형의 마음을 돌리려고
자기보다 먼저 사람을 보내고 선물도 보냅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기 전에 하느님과 씨름을 합니다.
우리도 사람을 만나기 전에 먼저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
특히 두려운 사람이 있다면 먼저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기로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