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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 정체성을 지닌 증거자요 사도인 바오로 사도




형제자매 여러분

바오로 사도가 로마 교회의 신자들에게 했던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리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깃들기를 빕니다”의 인사를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피시 베네딕도 16세 교황 성하께서 2008년 6월 28일에서부터 2009년 6월 29일까지 가톨릭 교회는 성 바오로 탄생 2000년을 기념하는 미사를 거행할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거행은 바오로를 스승으로 모시는 모든 그리스도교 제자들에게 해당되지만 특히 이방인의 사도의 고향이자 자신의 사도직을 전개해 나갔던 터키에 거주하는 우리들에게 해당됩니다. 이곳은 바오로 사도가 30년 남짓 수많은 지역을 선교 여행했던 곳입니다. 특히 이곳은 그가 적대받음, 죽을 위험, 감옥생활, 매맞음, 온갖 고난을 당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체험한 곳이기도 합니다.

안티오키아의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서 그는 이 안티오키아 공동체를 시작으로 터키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선교여행을 하였습니다

Seleucia, Iconia, Lista, Derbe, Pisidia의 Antiochia, Efeso, Mileto, Antalia, Perge, Troade는 오로지 실질적인 터키 선교지역 중의 몇몇 이름에 불과한데 이 지역들에 그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러 갔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터키지역의 많은 장소들은 바오로 사도의 열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가 개인적으로 방문하지 못하는 지역들은 서간을 보내었습니다.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은 말로 선포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권고의 서간으로 퍼져나갔던 살아 있는 사도적 활동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필립 1,18) 이라면 모든 것을 하였고 모든 이의 모든 것 이 되었습니다(1고린 9,22). 에페소에서 사도 바오로는 약 3년정도 머물면서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을 작성했습니다.

오늘날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로 기억하는 Cilicia의 Tarso(사도 21,39)인 이 유대인은 누구입니까? 그는 AD 7-10년 경 Tarso에서 탄생하여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보내졌고 Gamaliele 학교에서 “조상이 전해준 엄격한 율법에 대해서”(사도 22,3)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율법과 유대전통에 충실했던 그는 가장 먼저 초기 크리스챤 공동체를 박해하였습니다(갈라 1,13-14).

루가 복음 사가는 바오로는 유대교 출신인 그리스도교인들을 찾아서 감옥에 보낸 열혈당원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사도 9,1-3). 또한 바오로가 스테파노를 죽이는데 동조했던 사람들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루가 복음사가에게서 전해 듣고 있습니다(사도 8,1). 그러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초기 공동체에 대한 그의 적개심이였습니다!

그러나 Damasco에서 하나의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의 적대자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리스도는 번개와 같은 섬광으로 율법에 광적인 이 열혈주의자의 삶안에 들어오게 되고 그를 복음의 사도로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충직성과 완전한 투신을 지닌 율법 준수자가 이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데 그리스도는 바오로를 눈멀게 함으로써 그에게 현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다시 보여줍니다. 요한 크리스토모스는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그는 악을 보아왔으므로 하느님은 그를 선으로 이끌 목적으로 눈멀게 하고....그러나 그를 눈멀게 한 것은 어두움이 아니라 너무나 밝은 빛 때문이었다”(Panegirico IV su Paolo 2)

Damasco에서 바오로는 엄격한 율법의 준수가 완전한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은 죽은 육체와 같은데, 이 율법의 이름아래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이들을 박해하고 죽이는데 까지 동조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며 계명들을 오로지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이러한 율법적 경향들 앞에서는 항상 하느님이 하나의 우상으로 변형되어 버리고 그분과의 관계를 사랑의 마음이 없는 계약으로 탈바꿈 시켜 버리는데 Damasco를 체험한 바오로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거듭 말합니다:

당신 구원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0,4). 오로지 인간적인 노력들로만으로 자체로 거룩해지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Damasco이후 바오로의 삶은 완전한 방향의 변화를 알게 해줍니다. Damasco에서 그리스도인 Aanania(사도 9,10)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믿게되었고 “보고 들은 것”(사도 22,15)을 설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사도들(“와서 보시오”)과 의심많은 토마가 증언했던 것처럼(“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Gv 20,27),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체험으로 신앙의 증거자가 됩니다. 같은 신앙을 지닌 이들의 적대감이 커지자 아라비아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갈라 1,17). Damasco로 돌아온 바오로는 정치 지도자들과 그곳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로부터 적대감을 받게 되었는데 열렬한 율법주의자에서 그리스도교 선교사로 변화된 데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삶은 끊임없이 위협을 받게 되었고 이렇한 이유로 몇몇 동료들은 사방으로 성문이 지켜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를 광주리에 담아 성 밖으로 달아 내리게 됩니다(사도 9,23-25).

이 시기에 바오로는 사도들을 만나기위해 예루살렘으로 갔으나-루가 복음사가가 언급했듯이- “모두 그를 무서워하였고 그가 사도라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사도 9,26). 그를 사도들에게 그리고 공동체에 소개하고 그들에게 Damasco의 체험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을 한 사람은 바르나바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잠시 머물면서 바오로는 주님을 전하였지만 몇몇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하였기 때문에 Tarso로 그를 피신시켜야만 했습니다(사도 9,30).

그가 태어난 도시에 머무른지 약 4년 정도 되었을 때 바르나바는 Antiochia에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를 찾아 왔습니다(사도 11,25).

처음부터 부터 바오로는 Antiochia 공동체에서 교회 구성원이 되게 됩니다. 사실 이곳에서 그는 첫 번째로 바르나바와 함께 선교를 시작하고(사도 13,2-3), 다시 되돌아 온 곳이며 (사도 14,26,28), 두 번째 선교여행도 (사도 15,36-40. 18,18-22) 이곳에서 시작하였고, 세 번째 선교여행도 이곳에서 시작하게 됩니다(사도 18,23)

Antiochia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던 반면 몇몇 Palestina에서 온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할례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을 따르는 결정은 “예루살렘 사도회의”(AD 49년)라 일컬어지는 데서 기원하였는데 여기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이방인에서 개종한 이들은 모세의 율법에서 면제된다고 선포하였습니다(사도 15,5-29). 이러한 결정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유대교의 성격을 띤 보다 완전한 형태를 취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하나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결정으로 바오로는 단호하게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Antiochia에서 베드로와 반대로 맞선 것은 타협이나 후퇴로 부터 새로운 그리스도교 정체성을 보호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갈라 2,11-14).

바오로를 우리가 사는 터키지역에서 그리스까지 계속해서 횡단하게 했던 여행들은 사도행전에서 루가 복음사가가 기록한 것이고 우리들 각자는 손에 이 사도행전을 다시 들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변함없는 열정을 묵상함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Yavaç인 Pisidia의 Antiochia와 Efeso(Selçuk)에 한정하여 바오로의 현존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47년경에 바오로는 Perge에서 Pisidia의 Antiochia에 도착하였습니다(사도 13,14-52). 그 지역의 회당에서 바오로는 구약성서에서 세례자 요한까지 이르는 구원역사의 중요한 단계들을 경험하게 되었고 하느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신 예수를 선포하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구원의 역사는 바로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결정적으로 이루어 지는데 주님안에서 바오로는 메시아가 약속한 모든 것들이 실현되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안에 계신 분은 유일하신 한 아드님입니다.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여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계시인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사랑의 구원계획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그리고 모든 이를 위해 존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나다. 사도에게서 이루어진 이러한 선포는 그를 받아들이기 위한 몇몇 준비들과 그를 Antiochia로 피신해야만 하게 했던 다른 반대적 측면들에서 발견됩니다(사도 13,50-52).

바오로의 선교여행에 중요한 다른 여정은 Efeso였는데, 여기에서 바오로는 3년정도(54-57년) 머물면서, 유대인들이나 지역의 이방인들의 반대에 부딪치면서도 복음화의 광범위하고도 힘든 사업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이시기동안에 수많은 고통들을 암시해주는 것이 있는데 "Efeso에서 맹수들에 대항해서 싸웠다는 것"(1고린 15,32)을 그 스스로가 회고한 것입니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2고린 1,8-9)에서 "Asia에서 있었던 일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견디어 낼 수 없을 만큼 심해서 마침내 우리는 살 희망조차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아마도 Efeso에서 몸소 겪었던 감옥에 대해서 암시하고 있습니다(로마 16,3.7).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바오로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생겨난 필요성이었습니다. 다시말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은 삶 혹은 말로서 그분을 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다른 아들인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얘기한 것처럼 “바오로가 사도가 된 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살아난 죽은 이들과 병고침을 받은 나환우들에 대해서 말하러 나에게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에게 이것에 대해서 묻지 않으십니다. 바오로의 사랑을 지니고 영원한 월계관을 얻으십시오”(Panegirico III su Paolo 10)

네로황제 치하에 67년경 로마에서 사도가 흘린 피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 형제들을 위해 자신의 운명적 최후의 삶을 바친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전에 필리피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서간을 썼습니다: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2,17).

터키의 형제자매 여러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의 유산이지만 바오로가 태어나고,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설교하고 많은 시련중에서도 그분을 증거한 이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특별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본받아야할 많은 의무들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물려받은 이러한 자랑스런 유산은 고갈될 것입니다. 박해자가 복음의 전파자가 되었다는 것을 바라보고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하느님은 우리 또한 변화시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분의 삶과 함께한 바오로는 우리가 그분의 은총과 함께 협력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다시한번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상기 시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기만 한다면 바오로처럼 되는데 가로막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은총으로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충실함으로 이렇게 되었습니다”(Panegirico V su Paolo 2-3). 오늘날 터키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에게 사도가 물려준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우리 주교단은 그의 서간들의 원천에서 몇몇 요소들은 특별히 소수가 신앙을 하는 상황안에서 사는 우리 공동체에 특별히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슬람 세계안에서 살고 있는데 이곳은 전통적 관점 안에서나 새로운 이슬람 신앙조직들이 용인되는 상황안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잘 배려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특유의 상황은 디아스포라에 살았던 초기 공동체와 비슷한 측면을 지닌 것으로 우리에게 우리 정체성의 더욱 분명한 인식을 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우리의 이러한 그리스도교 정체성의 근본적 측면을 다시 호소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슬림 형제들과 다른 많은 종교 신자들과 공감하는 하느님의 신앙에 관해서가 아니라 "주님"(1고린 12,3)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 "하느님께서 죽은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던 분"(로마 10,9)에 관한 것입니다.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안에....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머무르고 있습니다"(2,9)는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표현은 명확한 것이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 시킵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우리사이의 문이며 다리가 되십니다.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읽게 됩니다(2,5-6): "하느님은 한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바오로는 그분의 육화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사람이신 하느님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좁은문입니다. 그러므로 좁은문은 교회의 윤리 규범들을 받아들이고 교회의 제도들에 대한 인간적 엄격함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비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십자가가 광적이고 어리석게 보여서 반감을 주지만 바오로는 이것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필수적이고 폐지할 수 없는 요소이며 하느님의 힘을 나타낸다고 선포합니다(1고린 1,18).

하느님의 이러한 동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인데 하느님의 형언할 수 없는 본질을 구성하는 사랑의 표현으로 철학자가 하는 것처럼 초월은 인간존재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기준으로 평가됩니다. 사랑안에서 전능함은 인간존재의 전능함과 상응한다는 것을 아마도 우리들은 망각하지 않았습니까? 사랑은 하느님의 속성이 아니라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바오로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우리를 위한 이러한 사랑을 인간적 한계에 한정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육화와 죽음으로 확인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설입니다.

그리고 말과 표양으로 우리 신앙을 굳건하게 하는 바오로는 또한 대화의 사람입니다. 민족주의자들과 다른 전통종교들을 만나는데 익숙했던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성령은 교회안에서 현존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넘어서 교회밖에서도 활동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아테네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사도 17, 16-27).

이런 배경위에 우리는 이슬람 신자들과 대화를 증대하는데 초대 받았습니다: 삶의 대화, 여기에서 함께 공존하고 나눕니다; 행동의 대화, 여기에서 그리스도 신자들과 이슬람 신자들은 "통합적인 발전과 인간 해방의 관점"에서 함께 행동해 나갑니다; 신앙체험의 대화, 여기에서 영적인 풍요로움에 함께 참여하는데, 예를 들면, "기도, 관상 그리고 신앙과 하느님 혹은 절대자를 찾는 방법들을 위한 것입니다"(종교간 대화를 위한 교황의 권고-대화와 선포 42). 마지막으로 신학적 교환의 대화로 여기에서 더욱더 존중하는 관점에서 서로 조금 더 이해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러한 대화는 자신들의 신앙을 확신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각자 자체로 남아 있으면서 고유의 신앙의 정체성을 침해하지 않고 옳지 않은 것에 결코 침묵하지 않고 그리스도교가 아닌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만큼 어려울수 있는지를 알게 될 때 진정으로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옛 교부인 Poitiers의 Illario가 서술하는 바와 같이 "세상의 현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어리석게 보이고 우리에게도 의심스럽게 보이는 일들을 위해서?....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세상에게는 반감이 되고; 살아계신 하느님을 설교하지 못하기에 신앙이 없는 이에게는 하느님이 죽어있는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Liber de Synodis 27,85). 이것을 선포하는데 바오로는 위안을 찾지않고, 정신적 조건을 넘어서 신앙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에 반감이 되고 어리석은 것이 그에게는 인간을 위한 하느님 사랑의 강력한 증거였고 깊은 감사의 마음을 자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의 가르침에 덜 부합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그것을 그분의 가르침을 대면하면서 의무감을 느껴야 합니다.

비 그리스도교인의 살아가는 세상과의 이러한 만남에 있어서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관계들 안에서 사도가 우리에게 스승이라 한다면 그는 일치의 스승이자 근본이 됩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이 바오로의 해를 권고하면서 "특별히 모든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의무를 다한 이방인의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의 일치와 상호이해를 위해서 전적으로 온 몸을 다 바쳤습니다"라고 상기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날 그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우리의 교회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 생길 수 있는 완고함과 무관심을 극복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어려움, 또한 다른 한편으로 신앙을 지닌 형제들에 대한 어려움을 경험했던 사도는 "그리스도는 선포되어져야 한다"(필립 1,8)는 것을 우리에게 상키시키는데 비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지니도록 또한 초대하고 있습니다. 카톨릭, 정교회, 시리아, 카르데아, 프로테스탄트 이전에 우리는 그리스도교인입니다. 이러한 기초위에 증거자가 되는 우리의 의무가 놓여집니다. 우리와 다른 것들이 불신을 일으키고 신앙의 일치를 저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비 그리스도인이 우리의 분열로 인해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Tertulliano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기를 다음과 같은 단순한 이야기로 이방인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바라보십시오!”(Apol. 39).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무슬림 세계에서 그것을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한 성령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다”(1고린 12,13)는 인식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게 될 때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기초가 되는 생활은 지역 공동체의 다양성과 신학적 표현에 따른 차이만으로 부인될 수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미 설립될 때부터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위에 전체가 잘 결합되어 세워지고 건물의 가장 중요한 모퉁이 돌이 되신 그리스도의 건물안에서 모든 구성원과 단체들을 받아들입니다(에페 2,20).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희 주교단이 여러분에 보내는 서한은 바오로의 서한들부터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값지고 귀중한 제안들과 권고들에 비교하면 미약한 것입니다. 그의 서한들, 긴 역사는 항상 자극이 되고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양식에 양심성찰이 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회개가 필요하지 않는 종교적 현상으로 바라보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도들에 대항하여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 되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도록 항상 준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오로의 해를 준비함에 있어서 저희 주교단은 사도 바오로의 서한들을 개인적차원에서 읽고 본당 차원에서 교육의 원동력이 되게 하고 그리스도교 재일치의 주도적 역할을 해 나가기를 여러분들에게 권고 합니다. 저희 주교단 차원에서는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는 바오로를 기념하는 장소인 Tarso, Antiochia, Efeso에 순례하기를 초대 합니다.

터키 카톨릭 교회 차원에서는 2008년 6월 22일 Tarso에서 교황특사인 W. Kasper 추기경님의 집전하는 미사와 함께 바오로의 해의 개막을 선포할 것입니다.

이 장엄한 개막 후에 Tarso/Iskenderun의 바오로에 관한 심포지엄을 (06.22-24) 시작할 것입니다.

이 프로그램안에는 Tarso-Antiochi-Efeso로 이어지는 성 바오로의 발자취를 순례하는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정교회와 프로테스탄트의 우리 형제들과 함께 하는 창의적 프로그램들이 그 다음달에 여러분들에게 제안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바오로를 알게되면 그리스도를 더욱 더 잘 깨닫게 된다는 확신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게 합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의 신앙, 인간적 모든 바람들을 넘어선 그의 희망,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이 되게 한 그의 사랑이 사랑스런 이 터키 땅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평가기준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의 주교들,

+Mons. Luigi PADOVESE(Anatolia 교황 대리, 터키 주교회의 의장)

+Mons. Georges KHAZOUM(터키 아르메니안 카톨릭 보좌주교, 터키 주교회의 부의장)

+Mons. Hovhannes TCHOLAKIAN(터키 아르메니안 카톨릭 대주교)

+Mons. Ruggero FRANCHESCHINI(Izmir 대주교)

+Mons. Louise PELATRE(Istanbul, Ankara 교황대리)

+Corepiscopo Mons. Yusuf SAĞ(터키 시리아 카톨릭 총대주교)

+Mons. François YAKAN(터키 카르데아 카톨릭 총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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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페이지 김영우 2008.01.21 08:33:36
    +평화를 빕니다
    사도바오로에대하여 많은공부를 해야 할것입니다
    다음에는 바오로의 의화론에대하여 자료를 기재해주시면 저희들에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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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9 사해사본과 그리스도의 기원 전시회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6월 4일까지 사해사본과 그리스도의 기원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사해사본이란 쿰란의 동굴에서 우연히 발견된 성서 두루마리를 말하는 것이... 김요한 2008.02.05 4706
1258 08년도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봄철 프로그램 {FILE:1} file 프란치스코 회관 2008.02.10 6968
1257 숭례문의 화재 소실을 보며 우리 나라 고유 명절인 설 연휴를 마칠 무렵, 국보 제 1호인 숭례문이 불타서 소실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잘못 듣지 않았는가하고 귀를 의심하기도 했습니... 김요한 2008.02.13 4308
1256 제 7기 프란치스칸 영성학교 졸업미사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을 더 잘 알고 따르는 길을 알리고자 시작한 프란치스칸 영성학교가 2월 12일 서울 정동 작은형제회 수도원 성당에서 제 7기 졸업미사를 ... 김요한 2008.02.13 6439
1255 2008년도 제 19차 성체조배기초교육 개강 + 찬미예수님 서울대교구 지속적인 성체조배회에서 2008년 첫 성체조배 기초교육을 개최합니다. 주님의 말씀 성찬에 관심있는 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감사합... 성체조배회 2008.02.18 6810
1254 영화치료 (Emotion Picture Magic) 에로 초대합니다 http://www.jjscen.or.kr영화치료 (Emotion Picture Magic) 시네마 테라피는 정서적 심리적 건강과 성숙을 원하는 이들이 다양 한 심리정서에 관한 영화를 의식적... 전. 진. 상 영성심리상담소 2008.02.23 4349
1253 숭례문 사건이 이 시대에 던져주는 의미 신라시대에는 신라가 천만년 갈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고 고려시대에는 역시 고려가 천만년 갈 것으로 믿고 있었지만 6백년 밖에 못... 영진 2008.03.03 5075
1252 자기인식을 통하여 내면의 힘을 키우는 참자아 찾기 훈련으로 초대합니다 http://www.jjscen.or.kr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을 주고받는 삶이 어려운 것은, 치유를 필요로 하는 과거의 나, 즉 어린 시... 전.진.상 영성심리상담소 2008.03.12 4924
1251 맛세오 수사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이메일 주소가 찾아보니 없어졌길래 이곳 자유게시판을 이용해 인사드립니다. 오늘도 정성드려 주님께 성가를 드리고 돌아왔습니다. 해마다... 1 호데레사 2008.03.24 5871
1250 대운하에 위협받는 생명들을 위한 '생명의 근원, 강의 평화를 위한 미사' 한반도 대운하에 위협받는 생명의 강을 지키기 위한 생명평화도보 순례단 &quot;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quot;의 여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순례단이 한반도 대운하의 ... 천주교창조보전전국모임 2008.03.27 4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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