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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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적인 공동체, 성사적인 활동.
그제 봤듯이 야곱은 그리 훌륭한 아버지가 못 됩니다.
아니 자식들에게 잘못을 너무 많이 한 아버지입니다.
부모의 잘못 중에 가장 나쁜 잘못인 편애 때문에
요셉의 형들은 동생을 죽일 모의를 하고
결국 상인에게 팔아넘긴 나쁜 형들이 되었고,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은 많이 받았으나
형들에게는 버림받고 온갖 고생을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의 잘못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요셉의 형들이 한 짓은 해도 너무 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밉기로서니 어찌 죽이려 하고 팔아넘깁니까?
제가 옛날에 결핵환자들과 자활 공동체를 할 때
상당수의 결핵환자들이 가족들과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몇몇 분은 돌아가실 때 아주 고통스러워했지요.
의학적으로는 벌써 돌아가시고도 남을 지경인데도
못 돌아가시는데 그 이유가 가족에 대한 증오 때문이었습니다.
그 옛날 결핵은 패가망신하게 하는 병이었기에
결핵에 걸리게 되면 집에서 내쫓거나 방치를 했는데
가족이 그랬기 때문에 더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가족을 그리 미워했던 죄에 대한 고백성사를 보고,
다시 말해서 가족을 용서하고 난 뒤에야 편히 돌아가십니다.
이렇듯이 가족 간의 죄가 남남 간의 죄보다 더 용서키 어려운 법인데
그런 것인데도 요셉은 형들의 죄를 다 용서합니다.
아무튼 요셉의 용서는 대단한 용서라고 할 수 있는데
요셉의 용서를 인간적으로만 해석하면
성공한 사람, 행복한 사람의 용서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행복한 사람만이 용서를 할 수 있지요.
원수가 원수인 이유는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불행하기 때문인데
지금 내가 행복하니 그가 더 이상 원수가 아니고
행복한 사람의 넉넉한 마음으로 불쌍해진 원수를 용서하는 거지요.
그러나 오늘 요셉의 용서는 이런 인간적인 용서를 넘어서는 겁니다.
그 몹쓸 짓을 한 것이 형들의 잘못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하느님께서 형들의 잘못을 통하여 자기를 이집트로 이끄셨다고 합니다.
악으로도 선을 이루실 수 있으신 하느님은
인간의 잘못을 가지고도 구원을 하실 수 있다고 믿은 것이고,
그러므로 형들이 자기를 팔아넘긴 것이 아니라
이 하느님이 자신을 이집트로 이끄신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요셉은 성사적인 용서를 한 것이고, 구원의 용서를 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이의 용서이고, 공동체의 구원을 위한 용서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문을 하게 됩니다.
나는 행복한가?
성공을 하여 행복한가, 구원 받아 행복한가?
용서하는 나인가,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아직도 불행한가?
우리 공동체는 구원의 공동체, 성사적 공동체, 용서의 공동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