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오늘로서 창세기가 끝납니다.
야곱이 죽고, 요셉도 죽는 것으로 창세기는 끝나는데,
야곱이 죽자 형들이 두려움에 빠지는 것입니다.
믿을 언덕이던 아버지 야곱이 죽었으니 요셉이
인제 자기들에게 앙갚음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찾아와 자신을 요셉의 형들이 아니라 종들이라고
낮추면서까지 납죽 엎드리며 용서해달라고 하고 살려달라고 합니다.
이에 요셉은 아주 서글퍼집니다.
자기를 아직도 그렇게밖에 믿지 못하는 것이 서글프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몹시 서글픕니다.
우선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서글픕니다.
형들은 자기를 여느 인간처럼, 아니 자신들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앙갚음이나 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며,
자신이 이집트에 오게 된 것은 형들이 팔아넘겨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먼저 데려오신 거라고
그렇게 말했음에도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자신으로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서글픕니다.
자신은 자신을 이집트로 데려오신 것이 하느님이라고 믿는데
형들은 자신이 이집트로 오게 된 것이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 때문이라고 여전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형들은 그렇게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아직도 자기들의 죄만 보고 있기 때문이고
인간이 아무리 악을 꾸며도 그것을 선을 바꾸실 수 있는,
그런 능력과 자비의 하느님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믿을 수 없는 자신들처럼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보통 자신을 하느님에게 투사하지요.
자신을 믿지 못하기에 하느님도 믿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에게 하느님은 자신들처럼
악을 가지고도 선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 아니고,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며
죄지은 사람에게는 몇 배로 벌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자기 안에 갇혀 하느님을 못 보고
자신의 죄에 빠져 하느님의 사랑과 좋으심을 못 보는,
그런 요셉의 형들과 같이 가련한 존재가 내가 아닌지,
조심스럽게 자신을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현실은 없고 관점만 있다는 말이 있듯이
동일한 것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것,
그 바라봄의 시선은 자신이 어떠한 경험을 했느냐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
결국 모든 것은 자기 투사라는 말이겠지요.
자신이 그러니 상대도 그럴거라는.....
제 자신에게 이런 모습은 없는지 돌아 보게하는 순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