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잔치 상에 남겨진 과자 조각 (Banquet Piece with Mince Pie: 1631)
작 가 : 빌럼 클라스 헤다 (Willem Claesz Heda)[1594- 1680]
크 기 : 캠퍼스 유채 106.7 x 111cm
소재지 : 미국 워싱턴 국립 미술관
신앙의 내용을 시각적인 차원에서 처리하는 성 미술의 소재는 오랜 세월동안 성서적 내용이 대종이었으나, 점점 선택에 폭이 넓어지면서 이 세상을 하느님 작품 장으로 설명하는 양상으로 확대되어 역사에 나타나는 여러 사건들이나 사물을 통해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17세기부터 네덜란드에 발달한 것이 바로 바니타스(Vanitas) 라는 양식이었다. 이것은 구약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 구절을 작품화하는 것이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은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코헬1: 2)
얼핏 들으면 인생의 허망감을 부채질 하는 맥 빠진 하소연 같으나, 네덜란드 작가들은 삶의 아름다운 현실 속에 들어있는 죽음과 허무의 씨앗을 발견 제시함으로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즐기면서도 삶의 깊은 교훈을 새기게 만들자는 의도로 정물화적인 기법을 사용했다.
많은 가정에서 정물화는 장식 효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나, 17세기경 네덜란드의 화가들이 이것을 단순한 장식 효과가 아닌 교훈적인 내용을 목표로 제작함으로서 성 미술의 주요 내용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바니타스(Vanitas)는 아름다운 꽃이나 귀한 물건들을 배치하여 보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면서도 여기에 머물지 않고 성서적 내용을 발견하여 자기 인생을 추스르고 신앙적인 길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효과를 겨냥하는 것이 되었다.
즉 삶의 즐거움에 도취하게 만드는 여러 재료들을 통해 반사적인 효과 , 인생을 덧없는 것이니, 현세 삶에 도취되어 영원한 삶의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라는 내용으로 종교적 가치에 귀의하게 만들었다.
바니타스는 1550년경에 독자적인 분야로 발전하여, 1620년경에는 매우 인기있는 장르가 되었다. 바니타스는 1650년경 쇠퇴할 때까지 주로 네덜란드의 연합주인 레이덴(Leiden)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 지역은 인간 죄의 부정적 차원을 극단으로 강조하면서 윤리적 기준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칼뱅주의 신학의 중심지였다.
이 시대 화란에서 이런 작품이 유행하게 된 것은 종교적 차원에서도 이유가 있었다. 당시 화란은 세계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여 자연스럽게 호사로운 생활에 빠져들기 쉬운 처지가 되었다.
이들은 가톨릭의 부패와 교황의 횡포에 진절머리가 나서 개신교 신자가 되었기에 가톨릭적인 요소 즉 성 미술로 표현되는 많은 것에 대해 개신교 특유의 편협한 표현인 우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배격했다.
이런 현실에서 개신교 신자들은 가톨릭의 성 미술과 다른 차원의 시각적인 것을 신앙생활에 도입해야 한다는 실천적 요청을 받게 되었는데, 이런 정물화가 이런 의도 표현에 제격이기에 대단한 속도로 퍼져나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게 되었다.
작가는 건축 설계사인 아버지로부터 태어나, 선천적으로 예술적 감각이 있었고,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면서 오로지 외골수로 정물화에만 몰두함으로서 이 방면에 두각을 드러낸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작품은 화란에서 정물화가 대단한 호응을 받고 있을 때 제작된 수준 높은 작품이다.
작가는 먼저 작품의 내용을 연회 식탁으로 제한하면서 심도 있게 접근했다.
연회의 식탁은 인간 삶의 기쁨과 행복이 교차되는 자리인데, 작가는 이 평범한 공간을 의미 있게 처리함으로서 인간 삶의 즐거움의 축제 속에서 인간 삶의 시원한 진리를 확인하고 배울 수 있는 교훈적 작품을 남겼다.
이 식탁 많은 사람이 참석한 연회라고는 볼 수 없으나, 그래도 기품 있는 사람이 손님을 초대한 자리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런 장면을 그리던 과거 작가들은 식탁보를 하나같이 화사한 희색으로만 처리했으나, 작가는 밑바탕에 암울한 회색보를 배치함으로서 아침식사나 축제처럼 유쾌한 인간 삶의 근저에는 죽음과 노화와 같은 어둠도 있음을 미리 상기시키고 있다.
식탁은 부유한 사람이 준비한 연회상임이 분명하게 보이는 격조 높은 고급 물건으로 배치되어있다. 성대한 연회가 끝나 정리를 위해 식탁을 손질한 모습이다.
고급 잔들이 접시 위에 얹어져 있고 먹다 남은 고급 음식이 처리를 기다리고 있다.
오른쪽에 정갈스러운 솜씨로 껍질을 벗긴 레몬이 있다. 싱그러운 향기를 내는 레몬은 서양 음식엔 필수적인 것이나, 이것은 올리브와 함께 지중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것이라, 당시 북유럽인 네덜란드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것이기에 연회를 준비한 주인의 재력을 과시하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싱싱한 굴을 먹기 위해 준비된 것들이 있다. 갓 구운 듯 먹음직하게 보이는 빵이나 먹다 남은 파이는 더 없이 값비싼 것이긴 하나 연회가 끝난 현실에서는 쓰레기통에 들어갈 물건들이다.
인생 역시 아무리 부유하고 고귀한 처지에 있던 사람이라도 식탁에 남겨진 음식처럼 언젠가 역사의 무대에서 떠나야 할 때가 있음을 작가는 전하고자 한다.
물주전자로 사용한 주석 주전자와 다른 그릇들이나 술잔들은 외모로 보더라도 희귀한 고급품임을 알 수 있다.
유리 제품은 오늘도 세계적으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베네치아 제품이며 여기에 마시다 남은 고급 술이 담겨져 있다.
이처럼 비록 정리를 위해 마구잡이로 식탁위에 널부러져 있는 집기들은 하나같이 고급 제품이어서 그 주인의 대단한 신분을 암시하고 있으나, 왼쪽 끝에 있는 촛대가 이 식탁 주인의 미래를 설명하고 있다.
고급 촛대에 불 꺼진 초가 있다. 촛물이 아래로 떨어진 상태에서 불이 꺼져 있다. 그 옆엔 촛불을 끄는 도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아 연회가 끝난 후 즉시 촛불을 끈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다 종말을 상징하고 있다. 성대한 연회가 끝나고 촛불이 꺼지듯 이 연회를 준비한 주인, 초대받은 사람들도 언젠가 떵떵거리며 살던 이 세상 무대에서 사라져야 할 때가 있음을 잊지 말아 달라는 암시를 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살만한 가정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장식용 정물화에 담겨 있는 인생의 깊은 지혜를 알리고 있다.
전통적인 가톨릭 성화의 주제는 성서와 교회 역사에서 드러난 신앙의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화란의 개신교도들은 이것을 사용하기가 어려웠기에 자기 삶의 공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식용 정물화를 통해 인생의 진면모, 즉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사라지는 것이니, 너무 기대를 걸지 말고 오직 하느님께만 믿음을 두고 살라는 신앙적 교훈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권장할 만한 내용들이다. 이 세상 삶 안에서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많은 사건들과 풍경화 한 폭 안에도 신앙의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가톨릭 신자인 우리들에게도 어떤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이 작품은 성서의 다음 구절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시다.”(1 베드1: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