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고르지 않다고 주님께서 못 오실까?
곧은길이 아니라고 주님께서 올 마음이 없으실까?
그것이 물리적인 길이라면 고르지 않다고 주님께서 못 오시거나
길이 곧지 않다고 오실 마음이 없으실 리 없을 것입니다.
길이란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고
오고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길이란 그야말로 소통을 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사야서가 얘기하는 주님의 길을 닦으라는 말씀이나
복음에서 얘기하는 주님을 길을 곧게 하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가로막는
우리 안의 그 무엇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그것이 죄라고 얘기하고 있고
따라서 길을 닦는다는 것, 그 무엇을 제거한다는 것은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가로막는
우리의 첫 번째 죄는 무엇일까요?
오시겠다는 주님의 전갈조차 받지 않는 죄가 아닐까요?
오실 길 준비하기 전에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겠다는 전갈을 받아야 하는데
전갈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갈을 받지 못함은
주님께서 전갈을 우리에게 보내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오겠다는 신호와 전갈을 계속 보내시지만
우리가 그것을 듣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전파를 계속 보내지만 주파수를 맞추지 못함과 같습니다.
아니 주파수를 맞추려 하는데도 맞추지 못함이 아니라
다른 전파에 나의 주파수를 맞추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오는 방송보다
세상 얘기를 전해주는 방송이 훨씬 재미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 주변에는 다른 사람은 재미없다고 안 보는 평화 방송을
채널 고정하고 보는 분들이 여럿 계십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상당수는 가끔 보던지 아예 안 봅니다.
두 번째 죄는 수신기 불량입니다.
주파수는 주님의 방송에 맞추어놓았지만 수신기가 영 불량입니다.
수신기 성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안테나도 떨어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전파가 지지직대기만 하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듭니다.
공중에 전파가 아무리 많아도 나의 안테나는
주파수를 맞춰놓은 그 전파만을 감지하고 수신해야 하는데
나의 안테나는 감지 능력이 떨어지고
다른 전파도 같이 수신하는 것입니다.
영성적인 표현을 한다면 영적인 감수성이 영 시원치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적인 감수성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한 편으로
갈망을 간절하게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주님의 말씀에 익숙하도록 감수성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강의를 위해 한 달에 한 번 워싱턴에서 뉴욕을 기차로 오르내렸습니다.
어느날 필라델피아에서 사람을 태우고 다시 기차가 뉴욕을 향해 가는데
그때 저의 귀에 작게 얘기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습니다.
한국말이었습니다.
굶주렸다가 오래간만에 듣는 한국말이 그렇게 반갑고
익숙한 한국말을 듣는 것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제가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 한국 사람들이 저 뒤 멀리서 얘기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가까이서 얘기하는 영어는 신경 쓰고 들으려고 해도 잘 들리지 않는데
저 멀리서 얘기하는 우리말은 그렇게 귀에 쏙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감수성도 이러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리울 정도로 갈망이 간절하면 작은 소리도 들립니다.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도 듣고픈 얘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낯선 것들이 아닙니다.
전에 나와 친했던 친구가 그립고,
나를 사랑한 어머니가 그리운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낯선 것이 아니라
우리말처럼 익숙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주님과 주님의 말씀도 늘 옆에 있는 익숙한 것이면서도
늘 그리워 갈망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옆에 있어도 늘 그리워하는 영적인 감수성,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곧은길이 아니라고 주님께서 올 마음이 없으실까?
그것이 물리적인 길이라면 고르지 않다고 주님께서 못 오시거나
길이 곧지 않다고 오실 마음이 없으실 리 없을 것입니다.
길이란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고
오고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길이란 그야말로 소통을 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사야서가 얘기하는 주님의 길을 닦으라는 말씀이나
복음에서 얘기하는 주님을 길을 곧게 하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가로막는
우리 안의 그 무엇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그것이 죄라고 얘기하고 있고
따라서 길을 닦는다는 것, 그 무엇을 제거한다는 것은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가로막는
우리의 첫 번째 죄는 무엇일까요?
오시겠다는 주님의 전갈조차 받지 않는 죄가 아닐까요?
오실 길 준비하기 전에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겠다는 전갈을 받아야 하는데
전갈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갈을 받지 못함은
주님께서 전갈을 우리에게 보내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오겠다는 신호와 전갈을 계속 보내시지만
우리가 그것을 듣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전파를 계속 보내지만 주파수를 맞추지 못함과 같습니다.
아니 주파수를 맞추려 하는데도 맞추지 못함이 아니라
다른 전파에 나의 주파수를 맞추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오는 방송보다
세상 얘기를 전해주는 방송이 훨씬 재미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 주변에는 다른 사람은 재미없다고 안 보는 평화 방송을
채널 고정하고 보는 분들이 여럿 계십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상당수는 가끔 보던지 아예 안 봅니다.
두 번째 죄는 수신기 불량입니다.
주파수는 주님의 방송에 맞추어놓았지만 수신기가 영 불량입니다.
수신기 성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안테나도 떨어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전파가 지지직대기만 하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듭니다.
공중에 전파가 아무리 많아도 나의 안테나는
주파수를 맞춰놓은 그 전파만을 감지하고 수신해야 하는데
나의 안테나는 감지 능력이 떨어지고
다른 전파도 같이 수신하는 것입니다.
영성적인 표현을 한다면 영적인 감수성이 영 시원치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적인 감수성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한 편으로
갈망을 간절하게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주님의 말씀에 익숙하도록 감수성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강의를 위해 한 달에 한 번 워싱턴에서 뉴욕을 기차로 오르내렸습니다.
어느날 필라델피아에서 사람을 태우고 다시 기차가 뉴욕을 향해 가는데
그때 저의 귀에 작게 얘기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습니다.
한국말이었습니다.
굶주렸다가 오래간만에 듣는 한국말이 그렇게 반갑고
익숙한 한국말을 듣는 것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제가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 한국 사람들이 저 뒤 멀리서 얘기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가까이서 얘기하는 영어는 신경 쓰고 들으려고 해도 잘 들리지 않는데
저 멀리서 얘기하는 우리말은 그렇게 귀에 쏙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감수성도 이러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리울 정도로 갈망이 간절하면 작은 소리도 들립니다.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도 듣고픈 얘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낯선 것들이 아닙니다.
전에 나와 친했던 친구가 그립고,
나를 사랑한 어머니가 그리운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낯선 것이 아니라
우리말처럼 익숙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주님과 주님의 말씀도 늘 옆에 있는 익숙한 것이면서도
늘 그리워 갈망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옆에 있어도 늘 그리워하는 영적인 감수성,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