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베드로 사도가 물위를 걷는 얘기는 마태오복음에만 나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의 구성은 참으로 뜬금없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움에 빠지는 것은
마르코복음에서도 같은 식으로 기술을 하고 이해할 만하지만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는
베드로 사도의 얘기는 그 상황에서 너무도 이상합니다.
그렇게 두려운 바다라면 거기서 살려달라고만 얘기하지
그 두려운 바닷물 위를 걸어갈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생각을 한다 하더라도 걸어갈 엄두는 내지 못할 겁니다.
그러므로 마태오가 이 얘기를 집어넣은 것은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점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고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두려운 게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이지요.
헌데 참 이상한 것은 우리 인간이 두려워하며 본다는 겁니다.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이고 두려우면 더더욱 안 보면 되는데
두려운 것이 있으면 안 볼 수가 없고 두렵기에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운 것은 안 볼 수가 없고 두렵기에 보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로잡히고 빠지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두려움에 빠지지요. 우리 인간은.
이것은 좋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너무도 좋거나 너무도 아름다우면 그것도
우리 시선을 잡아끌고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러니까 웬만큼 좋거나 아름다우면 우리를 잡아끌거나 사로잡지 못하고
웬만큼 싫거나 보기 싫어도 우리를 잡아끌거나 사로잡지 못하지만
너무 좋으면 우리를 사로잡고, 너무 싫고 두려워도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러니 선도 극단적으로 가면 우리를 사로잡지만
악도 극단적으로 가면 우리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뱀과 정말 아름다운 꽃이 같이 있다면 우리는 무얼 볼까요?
거의 대부분의 우리는 꽃이 아니라 뱀을 볼 것입니다.
마귀와 하느님이 같이 계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없다면 하느님이 아니라 마귀를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눈은 감성의 눈을 초월하는 것이며
분명한 하느님 선택이요 고도의 하느님 집중입니다.
줄타기처럼 늘 아슬아슬하게 하느님께 가는 것이고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떨어져 집중치 못하면 두려움의 심연으로 떨어집니다.
이것을 박해시대의 신앙과 비교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박해는 우리로 하여금 순교와 배교 중 하나를 선택케 합니다.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정에 끌리는 순간,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두려움에 머무는 순간 배교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 아닌 것에 조금도 곁눈을 주지 말고
초고도의 집중력으로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두렵기에 하느님께 집중하고 두려울수록 하느님께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