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오늘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독서에서 우리는
기쁘게 주는 이를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러니까 라우렌시오 축일에 왜 이 말씀을 듣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말씀이 라우렌시오 성인의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황제가 교회의 보물들을 몰수하려고 했을 때
부제로서 교회 재산을 관리하던 라우렌시오 성인은
교회의 보물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황제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을 데리고 갔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의 보물이라는 뜻이었다지요.
그리고 그런 라우렌시오의 행동에 모욕감을 느낀 황제는
너무도 분노하여 라우렌시오 부제를 석쇠에 올려놓고 불에 태워 죽였고요.
이런 라우렌시오를 오늘 미사의 본기도는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며, 신자들을 충실히 섬긴 순교자”라고 칭송하며
우리도 그를 본받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본기도를 바치면서 저는 저와 저희 공동체가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의 보물로 여기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나눠주는 라우렌시오 성인을
얼마나 본받고 있는지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를 반성할 때
가난한 사람들이 저의 보물이 아님을 먼저 반성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저에게 쓰레기가 아님은 너무도 분명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홀대하지도 않는 편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저의 보물이 아닌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이 왜 보물이고, 왜 저에게는 보물이 아닌가요?
가난한 사람이 보물인 이유는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한 프란치스코나 라우렌시오를 포함하여 모든 성인들에게는
가난한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저의 보물인 것까지는 도달했는데
가난한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에까지는 아직 도달 못한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인 거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난한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인 경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기꺼이 나누는 삶에 대해서도 반성을 하면
제가 움켜쥐고 있으면서 나누지 않는 것은 아닌데 시혜적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오늘 본기도의 말씀 중에서 섬겼다는 말씀이 마음에 걸립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가난한 사람들을 보물로 여겼기에
으스대며 시혜적으로 나눠준 것 아니라 섬김의 정신과 자세로 나누었고,
자기의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시는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 가지게 된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것을 나눠 주었지요
이점이 오늘 마음에 무척 걸립니다.
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섬기지 못하는지.
왜 아직도 내 것을 주는 양 주고 자기만족적으로 나눠주는지.
가난한 사람이 나의 보물이 될 때까지
라우렌시오 성인에게서 사랑을 배워야겠다고 다짐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