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녀 글라라는 자신을 작은 가지라고 하였는데
주님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작은 가지가 아니라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자기는 주님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
성 프란치스코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럼에도 이참에 저라는 나뭇가지는 어디에 붙어 있는지 생각해봤습니다.
그러다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주님 외에 어떤 다른 나무가 있다는 말인가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주님께 붙어 있는 가지인지
그렇지 않은 가지인지만 있을 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두 가지입니다.
떨어져나간 가지와 잘려나간 가지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떨어져나간 가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잘려나간 가지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가지가 스스로 떨어져나갈 수는 없고 나무에 붙어있거나
외부의 힘에 의해 잘리는 것밖에는 없기 때문일 것이고,
당신께 붙어있지 않으면 농부이신 성부께서 잘라내실 거라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성부께서는 정말로 잘라내실까요?
자비로우신 분이 정말로 그러실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그러시고 다른 복음에서도 그러시는데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아버지께서 베어버리시고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버리신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나무에 붙어있기는 하되 죽어있는 가지는 잘릴 겁니다.
삭정이를 아시나요? 삭정이, 바로 그것은
붙어있어도 죽은 것이고 그래서 잘려 불에 태워지고 말지요.
그렇다면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데
왜 삭정이가 되고, 어찌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까?
수액이 전달되는 것이 차단될 때 삭정이가 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이 수액의 차단됨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있어라.”
주님께서 사랑을 주시는데도 그 사랑을 원치 않고
자기 사랑 안에 갇혀 있거나 다른 사랑 안에 머물면
아무리 주님께서 사랑을 주셔도 그 사랑이 차단되겠지요.
글라라 성녀는 이렇게 주님을 찬미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를 매료시키고,
그분에 대한 관상은 우리에게 생기를 주며,
그분의 어지심은 우리를 채워주고,
그분의 감미로움은 우리를 가득 채워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신부가 신랑을 사랑으로 바라보듯
이런 주님을 매일 관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덕으로 자신을 치장하라고 권고합니다.
관상이란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머묾이고 주님을 바라봄이 아니겠습니까?
사랑 안에 머묾이고 사랑을 바라봄이 아니겠습니까?
달리 말하면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방황하지 않으며
호기심으로 이것저것 바라보지 않고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요 시선의 머묾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