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몇 번 용서해줘야 하는지에 대해 주님께 여쭈면서
자기 딴에는 최다 회수인 일곱 번이면 되는지 여쭙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일흔일곱이라는 횟수가 주님께서 적정 횟수로 제시한 것이기보다는
용서의 횟수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지도 말라는 뜻으로 제게는 들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주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였다면
이제 용서의 횟수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생각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자꾸 횟수를 따지게 된다면 왜 그런 것일까요?
용서할 마음보다는 용서치 않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원치 않은 것을 억지로 하거나 떠밀려서 할 때
우리는 얼마나 했는지 따지고 아직 얼마를 더 해야 하는지를 따집니다.
제가 마라톤을 뛸 때 보면 이것이 역력합니다.
컨디션이 좋거나 날씨가 좋아 상쾌할 때면 그저 뛰는 것 자체를 즐깁니다.
그러다 힘이 너무 들어 숨이 턱에 차면 지금까지 얼마나 뛰었고
앞으로 얼마를 더 뛰어야 하는지를 분 단위, 초 단위로 계산을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용서하고픈 마음이 없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이기에
우리는 용서하고픈 마음이 없다면 용서할 마음이 왜 없는지,
어떻게 하면 용서할 마음을 갖게 될지를 근본적으로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전에도 누차 얘기했듯이 용서는 행복한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용서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으며
누구 때문에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한 그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비유를 하나 드셨습니다.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의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는데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빚을 진 사람에게 무자비합니다.
이 비유에서 더 큰 문제는 그 사람의 결과적인 무자비함보다
원인적인 무자비, 곧 그는 왜 자비가 없는지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가 남에게 무자비했던 것은 그에게 자비가 없기 때문인데
자비를 그렇게 입었는데 그는 어찌하여 자비가 그렇게도 없을까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자기가 원하는 자비가 아니기에 그랬을까요?
아니면 하느님께서 주신 자비가 자기가 원하는 만큼 크지 않기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 그는 자비에 무감각한 사람,
달리 말하면 자비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고마움에 대한 감각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독히도 자기중심적이어서
용서건 은총이건 자기가 받는 것은 당연하고
하느님께서는 주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용서건 은총이건 그것이 하느님께서 자비하시기에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라면 마땅히 그리고 당연히 그리하셔야 된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기에 자비가 자비로 작동치 않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준 것 또한 탕감해주기보다
자기가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비는 없고 마땅한 것 밖에 없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에게
자기한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없음은 당연하고,
용서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 횟수를 따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당연한 것 밖에 없고 감사할 것이 없는 사람에게 행복은 없으며
행복이 없는 사람에게 용서란 꿈도 꾸지 못할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안에는,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고 봅니다.
제 자신을 들여다 봐도 얼마나 뿌리깊은 이기심이 똬리를 틀고 있어서
용서 못하는 이유를 찾고 있는데 골몰하는 제 자신을 보게 되지요.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마음 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목숨 걸고 무슨 전투에나 나가는 사람처럼
마음을 굳게 먹어야 비로소 행동화가 가능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뿌리 깊은 이기심, 자기 중심적인 사고, 사심을 취하면서 믿음의 생활을
해보려고 용을 쓰고 있는 제 자신을 문득 문득 보게 됩니다.
"원치 않은 것을 억지로 하거나 떠밀려서 할 때
우리는 얼마나 했는지 따지고 아직 얼마를 더 해야 하는지를 따집니다."
삶은 과정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지금 여기를 사는
살아있는 감수성으로 "당연한 것 밖에 없고 감사할 것이 없는 사람에게
행복은 없으며 행복이 없는 사람에게 용서란 꿈도 꾸지 못할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