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어떤 젊은이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대해서 물으면서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선행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에 영원한 생명은 선행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아는데
다만 선행 중에서도 어떤 선행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투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대인 십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어떤 다른 선행을 생각할 것도, 그 많은 율법도 생각할 것 없고
다만 십계명 중에서 이웃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말고
부모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젊은이는 이것을 다 지켰다고 아주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을 다 지켰다면.
특히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둑질이나 거짓증언 하지 않은 것과
부모에게 효도를 잘 한 것은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까지도 잘 했다니 대단하지요.
정말 이렇게 했다면 선행을 잘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완전해지려면 더 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고 그 정도로는 완전치 않다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정말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줘야 한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그렇게 할 수 없었지요.
그렇다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했다는 말은 결과적으로 거짓이 아닐까요?
그러나 제 생각에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실천하는 정도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거라고
정말로 의심 없이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정도면 되지 않겠냐고 선행의 한도를 정하곤 하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와 젊은이에게 주님께서는 부족하고 완전치 않다고 하십니다.
다 팔아 줘야 하는데 하나만 빠져도 부족하고 완전치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젊은이와 우리가 가진 것을 다 팔아 주더라도
아직 부족하고, 아직 완전치 않습니다.
다 팔아 나눠준 다음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다 포기하는 것은 나누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가난은 이웃과 나누기 위한 가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르기 위한 가난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저 Humanist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사랑에서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서 모든 것을 팔아 이웃에게 나누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팔아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무리 모든 것을 팔아 이웃에게 나눠준다 하더라도
부족하고 완전하지 않음을 깊이 마음에 새기는 오늘이요,
나의 선행이 아니라 주님을 따름으로 영생을 얻는 것임을
마음 깊이 새기는 오늘입니다.
성프란치스꼬의 덕행들에 바치는 찬가에서
".....한가지 덕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덕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은
모든 덕을 가지게 되도다.
그러나 한가지 덕을 거스르는 사람은
하나도 가지지 못하고 모든 덕을 거스르게 되도다."
즉 그 한가지가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말도 기억이 되네요.
"하느님은 우리가 하는 말마디보다 그 말마디에 숨은 의도를 보신다."라는 말....
우리가 하는 일이 결국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다보면 사람은 안 보이고 일만 보이고,
그 일로 인해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음을 경험합니다.
일을 위한 일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일이 되도록 안색을 살피는 그런 마음 가짐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는 이 순간입니다.
"우리의 가난은 이웃과 나누기 위한 가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르기 위한 가난이라는 뜻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