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가끔 생각합니다.
남에게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것은 성격인가?
자기는 바른 소리를 잘하는 성격이라고 말하곤 하잖아요?
그런데 이 때 우리가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어떤 사람은 진정 태어날 때부터 바른 소리를 잘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게 태어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 건가요?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처럼
죽임을 당할 수 있는데도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은
성격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입바른 소리를 아무리 잘하는 성격의 소유자라도
죽음을 무릅쓰면서 그러지는 못할 거라는 얘기고,
성깔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이며
성덕으로서만 할 수 있고, 하는 거라는 얘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가 헤로데처럼 추잡한 죄를 지을 때
‘에잇 더러운 놈!’하고 욕을 하거나
그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흥분하여 얘기할 수는 있지요.
그러나 이것은 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가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직언을 하는 것은
오직 사랑 때문에만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사랑도 죽음을 무릅쓸 용기 있는 사랑일 때만 가능한 거지요.
실제로 우리는 아무리 입바른 소리를 잘하고
성깔이 대단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권력자 앞에서 비겁하고,
자기가 다칠 것 같으면 입을 다무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사실 사랑의 직언은 내뱉거나 내깔리는 것이 아닙니다.
속에서 누르고 누른 뒤에도 올라오는 것입니다.
미움이나 분노는 당연히 누르고,
죄를 짓건 말건 내버려두고픈 마음도 누르고,
그렇게 눌렀는데도 올라오는 사랑,
돌 틈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샘물처럼
그렇게 올라오는 사랑에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몇 날 며칠을 그를 위해 기도하고 난 뒤에 나온 말,
이 말로 할까 저 말로 할까 고르고 고른 뒤에 나온 말,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많이 성찰하고 나온 말,
그래야지만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바른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말이란 한 번 쏟아 놓으면 주워 담을 수 없어
말한 후 뒷 감당 할 수 있는가 까지 염두에 두워야.....
열번 참다 이건 아니다 싶을 때. 사심 없이 객관적으로 봐도 아니다 싶을 때,
용기를 내는 것, 쉽지 않지요.....
제 성질 못참고 한다던지 자기 중심적인 입장에서 하는 말은
반드시 뒷맛이 쓰고 그제서야 양심의 소리를 듣고 후회 할 때가 많지요.
댓글을 쓸 때 부담이 되는 까닭도 그런 연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몇 날 며칠을 그를 위해 기도하고 난 뒤에 나온 말,
이 말로 할까 저 말로 할까 고르고 고른 뒤에 나온 말,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많이 성찰하고 나온 말,
그래야지만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바른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